박상준 와세다대학교 국제학술원 교수가 7월 25일 오후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자신이 쓴 책 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일본은 장기불황 시절 도로 건설 등 쓸데없는 토건정책에 재정을 낭비하고 부실정리를 제때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한국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과 성장률 높이기 위주 정책은 위험하고, 대기업은 소비 확대를 위해 임금총액을 늘려야 한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서울대에서 진행한 <한겨레> 인터뷰에서 “한국은 일본식 장기불황 터널의 입구에 이미 서 있다. 일본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박 교수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0년 말부터 일본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은사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서울대 총장)가 주도하는 동반성장연구소가 주최한 포럼에서 강연하기 위해 방한했다.
박 교수는 “최근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초 장기불황 진입기의 일본을 연상시킨다”며 급격한 성장률 하락과 고령화 진전, 주력 산업의 경쟁력 상실, 지속적인 통화가치 절상 압력, 디플레이션(물가 하락)과 국가채무 증가에 대한 우려를 유사점으로 꼽았다. 그는 특히 “지금의 한국은 20년 전의 일본과 고령화라는 인구구조에서 거의 유사하다”며 “한국의 65살 이상 고령자 비율은 2015년 13.1%로 1992년의 일본과 비슷하고, 20~50대 생산가능인구도 2015년 정점을 찍어 1995년의 일본과 같다”고 강조했다. 고령화의 진전으로 젊은층이 줄면 생산력이 떨어지고, 소비와 주택 수요가 감소하는 등 폐해가 크다. 그는 또 “최근 일본의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00%를 넘는데, 한국은 40% 전후로 상대적으로 건전하다. 하지만 일본도 1992년에는 40~50%로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으나, 이후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한국은 경제구조가 유사한 일본이 장기불황 기간에 겪은 ‘유동성 함정’(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현상)과, 장기 디플레로 인한 소비 지연→재고 증가→투자 부진의 악순환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한국이 일본과 다른 점으로는 기업 부채비율과 금융권 부실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을 꼽았다. “일본은 주식과 부동산 가격 급락 등 버블 붕괴로 기업의 줄도산과 금융권 동반 부실을 겪었다. 1990년대 초반 일본 기업의 부채비율은 400%에 달하고 부실채권 비율은 8%를 넘었는데, 최근에는 각각 각각 150% 선과 2% 전후로 개선됐다. 한국 기업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부채비율이 400%였는데 지금은 120~130%로 개선됐고, 부실채권 비율도 2% 전후로, 20년 전 일본에 비해 낫다.”
박 교수는 일본이 장기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유로 소극적인 재정·금융정책을 꼽았다. 그는 “일본은 전례가 없는 위기 상황에서 과거 정책을 답습했다. 돈을 많이 풀다가 인플레를 초래하지 않을지, 재정지출을 늘리다가 정부부채가 너무 빨리 늘어나지 않을지 걱정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실한 ‘좀비 기업’을 계속 연명시키고, 금융권 부실채권도 10년이 흐른 2005년에 가서야 겨우 정리했다”며 구조조정의 실기도 꼽았다.
박 교수는 대규모 양적완화 등 아베노믹스의 효과와 관련해 “일본이 본격 회복됐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불황터널에서는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만 “과거 2000년대 중반처럼 경제가 일시적으로 좋았다가 다시 불황터널로 들어갈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면서 ‘살얼음판’에 비유했다. 그는 일본의 변화와 관련해 한국과 중국에 추격당한 전자·자동차 등 기존 산업 대신에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무인자동차·친환경에너지·로봇·의료기술 등 차세대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그는 “최근 닛산자동차가 자율주행차를 대당 270만엔(3천만원)에 처음으로 팔기 시작했다.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에 맞춰 전세계에 무인자동차 시대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향후 물가 하락을 예상하는 디플레 기대심리가 최근 2~3년간 사라지고, 새 일자리가 늘면서 청년실업률이 5%대로 낮아졌다”며 “다만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에 미달하는 등 거시경제지표는 여전히 안 좋아, 일본 안에서도 경기회복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해법으로 적극적인 재정·금융정책을 꼽으면서, 단순히 정부지출을 늘리는 것보다 제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과거 유력 정치인의 지역구에 도로 건설 등 쓸데없는 토건정책에 정부지출을 낭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한국도 경제활동인구 감소가 예상되는 터에 도로 건설에 돈을 쓸 게 아니라,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를 위한 보육 지원, 청년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대한 지원, 노인·고아·미취업자·사업실패자 등에 대한 기초생계 지원에 힘써야 한다.”
박 교수는 한국 정부가 사실상 부동산 부양책을 쓰고, 성장률 높이기 위주의 경제정책을 고수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생산가능인구가 줄면 집값이 오를 수가 없다”며 “한국 정부가 부동산 수요를 자극하는 정책을 고집하다가는 집값 급락으로 큰 충격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일본이 과거의 높은 성장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도 장기불황의 원인”이라며 “한국도 성장률을 3~4%로 높이기 위해 무리한 부양책을 동원하다가는 오히려 0%대로 낮아질 수 있는 만큼 2%대 성장에서도 사회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내부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박 교수는 청년실업 타개를 위한 대기업 역할도 강조했다. “소비가 살아야 기업도 살아난다. 내부 유보금이 많은 대기업이 (1인당 임금인상 대신) 고용 확대를 위해 임금총액을 늘려야 한다. 한국 대기업은 일본 대기업과 영업이익률이 비슷한데, 인건비 비중은 낮다.” 그는 이어 “아베 내각이 내수 확대를 위해 일본 대기업에 임금인상을 요청할 때마다 경단련은 긍정적 검토 뜻을 밝혔고, 실제 대기업들이 임금을 올렸다”며 “하지만 한국의 전경련은 임금인상이 고용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반발한다”고 비교했다. 박 교수는 또 “일본 중소기업의 임금은 대기업의 80% 이상인데, 한국은 절반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을 살려서 임금을 올리고 고용도 늘리려면 대기업이 (갑질로) 힘들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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