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이 마련한 올해 ‘경제발전 경험 공유사업(KSP) 세미나’가 지난달 28일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 등 350여명이 참여해 케이에스피의 주요 성과와 향후 추진 방향을 두고 논의를 벌였다. 케이에스피는 한국의 발전 경험을 배우고자 하는 나라에 필요한 정책 연구와 자문, 교육훈련을 제공하는 국제개발협력 사업으로 2004년부터 시행중이다. 선진국을 따라 배우기 바빴고 여전히 추격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위상이 한결 높아진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앵거스 디턴 교수가 환담을 하고 있다. 기재부 누리집
세미나에서 관심을 끈 사람은 디턴 교수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데다 현재 세계적 이슈인 불평등과 연관된 소비, 빈곤, 복지 분야에서 주목할 업적을 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기조연설을 한 뒤 가진 기자회견(<중앙일보> 단독회견 포함)에서 예상대로 불평등 얘기가 많이 나왔다. 그의 진단과 처방이 과감하거나 새롭지는 않지만 귀담아들을 만했다.
디턴 교수는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소득 격차가 아닌 다른 요인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재분배정책만으로 해소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뒤쳐지는 집단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한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다. 조세와 보조금 등에 기댄 재분배정책에만 무게중심을 두지 말고 사회구성원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수 있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디턴의 이런 주장에 이견을 나타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회의 평등만 제대로 실현돼도 결과의 불평등이 상당부분 해소돼 재분배정책의 필요성이 줄어들 수 있어서다.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 못지 않게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디턴 교수는 이어 “불평등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며 불평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주변의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불평등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불평등이 긍정적인 쪽으로 작용하게 하려면 “지대 추구와 정실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력과 혁신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문제가 될 수 있긴 해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반면, 자신의 부만 추구하고 정부에 특권 제공을 요구하는 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불평등은 성장을 촉진하지 않고 절망만 안겨준다”는 게 그 이유다. 기득권 집단이 경기규칙을 어긴 채 특혜를 누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 상황에서는 경제민주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해도 그르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진단에 크게 공감한다.
그렇다고 디턴의 발언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방한했을 때 한국의 소득 분배 현황을 살펴봤는데 전반적으로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중간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에 대체로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는 아마도 통계청의 공식 통계를 보고 이런 평가를 한 듯하다. 하지만 통계청 지니계수 등이 조사 방식의 한계로 실제보다 낮게 집계되는 문제점을 알았다면 이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디턴의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우리 현실을 돌아보자. 우선 기회의 평등이 요원해 보인다. 비영리 재단인 동그라미재단의 조사 결과가 이를 뭉뚱그려 일러준다. 지난 3~4월 3520명에게 한국사회가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인지 물었더니 공평하지 않다는 응답이 62.1%였고, 공평하다는 응답은 7.3%에 그쳤다. 집안 등 사회경제적 배경이 개인의 노력보다 성공에 더 중요한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렇다는 응답이 73.8%나 됐다. (그렇지 않다 9.6%) 지대 추구와 정실 자본주의 문제 또한 간단치 않다. 기득권층의 특권과 비리, 반칙이 계속 판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유 부총리는 디턴의 불평등 언급과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세미나 당일 디턴과 환담도 했다. 아무쪼록 이참에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정책 구상을 가다듬길 바란다.
이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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