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경제는 많은 불확실성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세계경제 회복세는 여전히 미약하고, 유례없는 저성장 흐름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연차총회의 기조연설문(서면 제출)에서 한 얘기다. ‘세계경제’란 말 대신 ‘우리경제’란 말을 넣어도 될 것 같다. 금융위기 이후 성장률이 3%에 못미치는 저성장을 기록한 햇수가 많고 당분간 이 추세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달 초 정부가 10조원 규모의 미니 부양책을 내놓은 것도 성장률이 둔화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게다가 물가상승률은 한국은행의 목표치를 몇년째 밑돌고 있고, 가계부채는 1250조원대에 이르렀다. 하나같이 풀기 어려운 과제여서 정책결정자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 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가 워싱턴에서 엇갈린 해법을 내놓은 것은 그런 과정에서 빚어진 일로 이해하고 싶다.
유일호 경제부총리(가운데)와 이주열 한은총재(오른쪽)가 지난 6일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과 환담하고 있다. 기재부 제공/연합뉴스
두 사람이 잇따른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을 정리하면 대강 이렇다. 유 부총리는 “우리나라는 기준금리가 1.25%라 아직은 (더 내릴) 여지가 있다”며 “금리 결정은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금융통화위원회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정정책은 쓸 만큼 다 썼다”고 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반면, 이 총재는 “통화정책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계부채 등) 금융안정 리스크를 고려할 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재정정책을 확장적으로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재정 건전성은 세계적으로 톱클래스다”라고 했다. 지금은 기준금리 인하보다 재정 확대를 할 때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일까. 유 부총리와 이 총재가 모두 자신들이 맡은 정책 영역에서는 여력이 없으니 상대방이 나서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나는 이런 상황을 꼭 나쁘게만 보지는 않는다. 기재부와 한은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이기주의로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다 보면 좀더 바람직한 정책이 나올 수 있다. 구조조정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두고 그러지 않았는가. 협의 과정에서 기재부와 한은이 적잖은 마찰을 빚기는 했으나 애초보다는 나은 방안이 마련됐다.
하지만 유 부총리와 이 총재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아쉬숨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굳이 외국 방문길에 상반되는 의견을 내 갈등을 낳을 필요가 있었나 싶다. 국내에서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눴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잦은 회동을 하면 한은 독립성을 해친다는 뒷말이 나올까봐 그러지 않은 것인가?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두 사람이 평소 정책 대응에서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유 부총리는 몇달 전 조선업 구조조정 등에 대비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한동안 머뭇거린 뒤에야 받아들였다. 또한 내년 예산을 추경 대비 0.5% 늘어나도록 짰는데 이는 사실상 긴축 기조다. 지금 경제 여건을 고려할 때 적절한 자세는 아니라고 본다.
유 부총리는 연차총회 기조연설에서 “저성장과 빈부격차 확대는 그간 세계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세계화와 기술진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악화시켰습니다. … 따라서 포용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사회통합을 강화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포용적인 경제정책은 특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런 만큼 곧바로 정책에 적절하게 반영하길 바란다. 입에 발린 대외용 발언이라는 의구심을 주지 말고….
이 총재도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한은의 설립목적인 물가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도 기준금리 조정 등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가계부채 문제에서도 진작에 목소리를 높였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최경환 전 부총리가 재작년 7월 취임한 뒤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높이려고 할 때 등이 그런 기회였다.
앞으로 유 부총리와 이 총재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이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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