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기업 경영에는 온 힘을 쏟아왔지만 정작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고 국민의 기대와 뜻에 부응하는데 소홀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2006년 2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반성했다. 삼성은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 드러난 불법 정치자금과 증여 사건에 대한 비판이 거세자 8천억원의 사회기금 헌납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2년 뒤인 2008년 4월 다시 국민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이 회장은 삼성특검 결과 자신을 포함한 최고경영진 다수가 차명계좌 운용 등 불법 혐의로 기소되자 대국민사과와 함께 퇴진을 선언했다.
지난 9일 검찰이 대통령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와 삼성 간 유착 의혹과 관련해 삼성사옥을 압수수색하자, 그룹 안팎에선 8년 전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계에선 삼성이 세 번째 대국민사과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삼성이 두 차례 대국민사과까지 하고서도 또다시 위기를 맞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계는 압수수색이 그룹 사령탑인 미래전략실에 맞춰진 것에 주목한다. 삼성이 2006년 발표한 6개항 중 실질적 구조 변화와 관련된 내용은 구조조정본부(현 미래전략실)의 기능 축소다. 2008년 발표한 8개항 중에서도 이건희 회장 퇴진 등 인적 책임 외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략기획실(현 미래전략실)의 해체다. 구조조정본부와 전략기획실은 이름만 다를 뿐 모두 회장 보좌, 계열사 지휘·감독을 하는 그룹의 사령탑으로, 총수 및 계열사 전문경영진과 함께 삼성의 성공 신화를 만든 ‘3각 편대’의 한 축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자금 제공 등 각종 불법행위의 주역이다.
미래전략실이 2010년 말 간판만 바꿔달고 부활할 때도 논란이 있었다. 그룹 사령탑이 필요하다는 현실론과 잘못된 관행이 지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공존했다. 2014년 5월 이 회장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이재용 부회장이 실질적 총수 역할을 맡은 이후 삼성이 외부 비판에 직면한 사건들은 대부분 미래전략실이 주도했다. 지난해 삼성물산-에버랜드 불공정 합병 논란 때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 강화를 위해 무리한 합병을 추진하다 헤지펀드인 엘리엇의 반대로 위기를 맞자, 국민연금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최씨 모녀에게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심도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두 차례 대국민사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법 논란에 시달리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핵심에는 미래전략실이 있다고 지적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미래전략실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잘못된) 결과에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심지어 불법도 서슴지 않는다. 또 기업 내부자로만 구성되어 있어 외부 환경과 시장의 변화, 국민 정서에 둔감하다”고 진단했다.
이 부회장은 10월 말 삼성전자 등기이사를 맡으며 책임경영 의지를 밝혔다. 삼성 안팎에서는 그가 갤럭시노트7 단종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는 ‘경영 리더십’을 발휘해줄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는 삼성의 차기 총수에게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회책임 리더십’이 여전히 미완성 과제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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