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4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와 노회찬 원내대표 등이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경유착' 글귀가 쓰여진 모형을 중장비로 해체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최순실 국정 농단’과 관련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해체하는 대신 미국의 헤리티지재단 같은 싱크탱크로 전환하는 쇄신안이 부상한 가운데, 정경유착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대국민 사과와 책임자 퇴진, 지배구조 개선, 회계 투명성 확보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1일 전경련과 회원사들 말을 종합하면, 전경련은 내년 2월 정기총회 때 쇄신안을 확정하기 위해 600여 회원사를 상대로 의견 수렴을 하고 있다. 유력한 방안은 구본무 엘지(LG)그룹 회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밝힌 싱크탱크 전환이다. 전경련은 국민이 해체를 요구하고 삼성과 에스케이(SK)가 탈퇴 약속을 한 상황에서 싱크탱크 전환을 유일한 활로로 삼는 분위기다.
하지만 싱크탱크로 전환해도 간판만 바뀔 뿐 실제 내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전경련은 2013년에도 경제민주화 요구가 분출되자 준법경영, 윤리경영, 정치적 중립성 등을 담은 기업경영헌장을 내놨지만 뒤로는 최순실씨 및 청와대와의 정경유착에 앞장섰다.
전경련이 2013년 윤리경영, 준법경영, 정치적 중립성 등을 담아 발표한 기업경영헌장. 비선실세 최순실씨와 관련된 정경유착 의혹이 드러나면서 제대로 된 안전장치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정경유착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전제조건으로는 사태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책임자 퇴진이 꼽힌다. 전경련은 미르·케이(K)스포츠 재단의 배후에 최순실씨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 석 달이 되도록 제대로 된 해명이나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국민, 국회, 언론을 상대로 거짓말과 증언 거부, 말 바꾸기를 거듭했다. 재단 모금을 주도한 이승철 부회장은 사태 초기에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수사중인 사안이라 말할 수 없다”며 버텼다. 검찰에서는 “기업들에 출연을 요청한 것은 청와대 압력 때문”이라며 책임을 미뤘다. 6년째 전경련 수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회장 쪽도 “재계 권유로 어쩔 수 없이 회장을 맡았고, 한 달에 한두 번 출근해 보고받고 대외행사에 참석해온 비상근 회장일 뿐”이라며 발을 뺀다.
책임자 문책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비리의 주역들이 물러나기는커녕 싱크탱크 전환을 포함해 쇄신안을 직접 만든다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승철 부회장은 내부 회의에서 ‘(청와대에서 시킨 일인데)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경유착에 관해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회장과 부회장, 관련 임직원들 모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개인의 안위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면서 허탈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청와대 등 권력의 요구를 핑계로 정경유착에 앞장서는 것을 막으려면 20여명의 재벌 총수로 구성된 회장단회의 폐지를 포함한 지배구조 개선도 선결과제로 꼽힌다. 경제5단체의 한 고위 임원은 “싱크탱크 전환이 이뤄진다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지금처럼 재계 인사들로 모두 채울 게 아니라 일정 부분은 공익대표에 할당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회계 투명성 확보는 어버이연합 지원이나 극우단체인 자유경제원에 대한 자금줄 역할 같은 ‘검은 거래’를 막기 위한 핵심 과제로 꼽힌다. 전경련은 연간 400억원에 달하는 예산의 수입·지출 내용과 재무 상황을 철저히 숨겨왔다. 심지어 사단법인의 헌법에 해당하는 정관조차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이는 대한상의가 산업자원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매년 정기감사를 받으며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과 대비된다. 한 경제단체 간부는 “전경련은 정경유착 근절 약속이 신뢰를 얻으려면 자발적으로 자금 조달과 집행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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