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는 재미가 없다.” 지난 7일 삼성그룹 수요사장단회의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는 “(내부) 분위기가 숙연하다. 어제 (국회 청문회에서) 기업들을 많이 혼냈으니까”라는 얘기도 했다. 기자들의 질문을 애써 피한 다른 참석자들의 표정도 씁쓸해 보였다. 하루 전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자신들의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주요 재벌그룹 회장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면박을 당해서 였을까. 정경유착의 공범이란 비판을 받고 기업 활동을 통해 나라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에 상처가 나서 였을까.
어쨌든 ‘기업하는 재미가 없다’는 말이 좀 걸린다. 박근혜 대통령을 업은 최순실씨에게 구린 돈을 건넨 게 드러났는데 여전히 이런 방식에 기대면서 기업하는 재미를 찾는다면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지프 슘페터의 ‘기업가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 6일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그룹 총수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재벌총수들은 예상대로 청문회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총수들은 핵심적인 의혹들에 대해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의사결정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식의 답변을 했다. 특히 의원들의 질문이 집중된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은) 단 한 번도 뭘 바란다든지, 반대급부를 바라면서 출연하거나 지원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출연과 최씨 딸 정유라씨 승마 지원이 대가를 노리고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앞두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주가를 조정한 게 아니냐는 의혹과 관련해 “미비한 것도, 고쳐나갈 것도 많지만 이렇게까지 의심을 하는 것은 조금 그렇다”는 말을 했다.
이들 발언의 진위는 특검 수사와 후속 재판에서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재벌개혁의 필요성은 다시 분명해졌다. 대다수 기업들이 정당한 내부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최순실씨에게 돈을 준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도 재벌그룹들의 경영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물론, 재벌그룹들도 할말이 있을 것이다. 씨제이(CJ)그룹 이미경 부회장 사임 사례에서 보듯, 청와대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몰라 어쩔 수 없이 돈을 냈을 수 있다. 그러나 재벌그룹들이 약점이 없었거나 이익을 기대하지 않았어도 대처 방식이 같았을까.
재벌그룹 총수일가들이 일감 몰아주기와 회사 기회 유용(지분 저가 매수 등)을 통해 큰 이득을 봤다는 분석을 보면 재벌개혁 요구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얼마전 10대 재벌 가운데 포스코와 현대중공업을 뺀 8개 재벌 31개 회사에서 65명이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불린 돈이 26조2128억원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이들이 지분 확보에 쓴 돈이 4756억원이어서 수익률은 5512%나 된다. 총수일가의 편법적인 부의 상속과 지배권 승계를 위해 기업들이 정상적 수준을 훨씬 넘는 거래비용을 문 셈이다. 이러니 공정거래법이 무력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재벌 계열사와 협력사의 동반성장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박 대통령이 재벌개혁(경제민주화)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어느정도 예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 질서를 확립하고, 균등한 기회와 정당한 보상을 통해 대기업 중심의 경제의 틀을 중소기업, 소상인과 소비자가 동반 발전하는 행복한 경제시스템으로 만들겠다”는 대선 공약의 문제의식은 살려야 한다. 재벌개혁이 다음 정부의 중요한 과제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이참에 재벌그룹들이 스스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마침 이재용 부회장이 청문회에서 몇가지 약속을 했다. 그룹 지휘탑인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전경련에서 탈퇴하며, 최순실씨 지원 의혹 등과 관련해 책임질 일이 있으면 지겠다고 밝혔다. 이를 그대로 실천하고 그동안 삼성그룹에 대해 제기된 문제들을 고치길 바란다. 외부 압력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푸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다른 재벌그룹들도 뒤따를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재벌그룹들이 더는 전근대적 소유·지배구조로 국민들의 걱정을 사서는 안된다. 그게 바로 촛불민심에 담긴 메시지의 하나다.
이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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