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시골 농장에 당나귀 한 마리가 살았다. 평생토록 농장 주인에게 고분고분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묵히 시키는 일만 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 기력이 쇠한 당나귀를, 주인은 매몰차게 헐값에 내다 팔 궁리만 했다. 당나귀는 뒤늦게나마 아코디언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발견하고선 한걸음에 주인집을 도망쳐 먼 길을 떠났다.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걷던 당나귀는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사냥개를 만났다. 사냥개 역시 늙어서 일을 제대로 못한다며 주인에게 내쫓긴 처지였다. 길동무가 되어 또 한참을 걸어간 당나귀와 사냥개가 작은 부둣가에 이르렀을 때 나직이 울고 있는 고양이가 눈에 띄었다. 고양이는 나이 들어 쥐를 잘 잡지 못한다며 주인이 자기를 강물에 빠뜨렸다고 연신 흐느꼈다. 당나귀와 사냥개는 고양이에게 앞으론 노래를 부르며 살아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당나귀와 사냥개, 고양이 셋이서 함께 나선 길. 어느 마을의 농장 옆을 지나는데 풀 죽어 고개 숙인 수탉이 보였다. 수탉은 하소연하듯 주인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면서 자기를 잡아서 수프를 끓이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같은 꿈을 꾸며 새로운 터전을 향해 나선 길동무는 어느새 넷으로 늘어났다.
‘그림 동화’ 제2판에 처음 수록
야코프와 빌헬름이란 이름을 지닌 두 형제(그림 형제)가 펴낸 동화집에 실린 <브레멘 음악대>의 들머리 이야기다. 독일에서 옛날옛적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설화를 모아 펴낸 ‘그림 동화’는 1812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란 제목으로 제1권이, 1814년 제2권이 출간됐다. 이어 1819년엔 두 권을 한데 합치고 새로 발굴한 이야기를 추가해 모두 170편을 담은 제2판이 세상에 나왔다. <브레멘 음악대>는 이때 수록된 동화다.
그림 형제는 평생을 독일 문화의 ‘원형’을 탐구하는 데 매달렸다. 특히 그림 동화 제1권이 세상에 나온 때가 마침 독일을 침략한 나폴레옹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음은 의미심장하다. 라인강 유역 일대를 무력으로 합병하고 옛 신성로마제국 영토를 무참히 할퀸 나폴레옹 군대의 말발굽에도 결코 억눌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그림 형제는 전래동화를 통해 웅변하려 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민족정기를 드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일 모든 가정에 그림 형제의 동화집 한 권씩을 의무적으로 비치하도록 한 웃지 못할 사정의 배경이기도 하다.
독일 브레멘 시청 앞에 세워진 브레멘 음악대 동상.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였던 브레멘엔 13세기부터 시 당국이 운영하는 음악대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브레멘시 누리집
전래설화 채집한 ‘그림 동화’에 수록
16세기 독일농민전쟁 시절 떠올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시발점으로
독일 전역 대규모 농민봉기의 물결
빈곤과 억압 등 농민계층 현실 자각
농노해방·공동소유 급진개혁 주장
‘초기 공산주의 운동’ 뮌처가 큰 역할
연대·저항·유토피아의 가치 일깨워
하지만 그림 형제가 채집한 수많은 전래동화 가운데는 단순히 민족정기로만 환원될 수 없는 또다른 자양분이 녹아 있는 것도 많다. 고된 삶의 무게와 그 삶을 이겨내려는 몸부림, 경제적 빈곤과 정치사회적 억압, 그에 맞서는 투쟁, 천지개벽에 대한 비원(悲願) 등 날것 그대로의 민초들의 정서 말이다. 네 마리의 짐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브레멘 음악대>가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독일 역사엔 <브레멘 음악대> 줄거리의 모티브가 되었음직한 사건이 있다. 16세기 전반기 독일 전역을 비롯해 스위스·오스트리아 일대를 휩쓴 농민봉기의 거센 물결, 이른바 독일농민전쟁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농민은 세속권력(영주·제후·관리)과 종교권력(교황·수도원)을 동시에 먹여 살린 유일한 생산적 계층이었다. 두 권력을 지탱한 세금과 관세, 십일조 수입의 원천은 한결같이 농민의 노동력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전쟁과 흑사병의 공포가 유럽 대륙을 휩쓸고 간 뒤 생산적 계층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경제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봉건 귀족집단의 해체와 분화가 가속화했고,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라 농민계층은 과거에 기댔던 최소한의 공동체 보호막에서조차 내쫓겨야만 했다. 예전엔 억압과 빈곤이 농민의 숙명이었다면, 이젠 여기에 불안정과 불안이 추가로 덧붙여진 셈이다.
독일 하나우에 있는 그림 형제 동상. 그림 형제는 하나우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민간설화를 채집하는 데 매달렸다. 하나우시 누리집
특히 옛 사회질서가 빠르게 허물어지던 15세기 말~16세기 초 독일 사회는 화약고 그 자체였다. 변화를 향한 첫 불씨는 세속권력이 아니라 종교권력을 향한 저항으로 지펴졌다. 가톨릭이 봉건제의 핵심을 이루고, 교회의 교리가 곧 정치적 교리인 세상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됨직하다. 첫 불씨를 지핀 인물도 농민이 아닌 성직자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 주인공은 1517년 10월31일 작센 지역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건 마르틴 루터다. 그러나 루터의 행동을 떠받친 실제 기반은 사회변혁의 열망이었고, 그 주된 에너지는 단연코 억눌린 농민계층이 앞장서 쏟아냈다. 성직자였던 루터조차 처음엔 “각종 무기들을 가지고 공격하여 저들의 피로 우리의 손을 씻어선 안된다는 말인가?”라고 절규했을 정도다.
후기 판본에선 급진적 모티브 사라져
알자스, 작센, 튀링겐, 슈바벤에 이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까지. 곳곳에서 억눌리고 가난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훗날 카를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프랑스혁명 이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만한 민중봉기”라 이름붙인 바 있다. 봉기한 농민세력의 급진적 요구를 억누르는 무자비한 진압도 뒤따랐다. 대규모 농민봉기의 결정적 장면은 1524년 5월15일 찾아왔다. 이름하여 ‘프랑켄하우젠 전투’. 독일농민전쟁 기간 중 최대 전투가 벌어진 이날,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은 끝내 패배했고, 포로로 잡힌 뮌처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날 하루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농민만 6000명이 넘었다. 루터 지지자였던 뮌처는 튀링겐의 뮐하우젠 지역을 근거로 농노 해방, 수도원 해체, 무주택자 거주지 마련 등 공동소유 확대, 십일조 폐지 등을 외치며 끝까지 농민봉기의 선두에 선 인물이다. 성서를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고 신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외쳤던 루터가 농민봉기의 폭발적인 에너지에 놀라 급기야 봉건 제후들과 손잡고 ‘반란’ 진압 쪽으로 돌아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시작은 같았으되 결국 다른 길을 걸어간 루터와 뮌처의 엇갈린 운명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과거 동독 시절엔 뮌처의 얼굴이 새겨진 5마르크 지폐가 유통되기도 했다. 동독 정부는 뮌처가 태어난 뮐하우젠을 ‘토마스 뮌처’로 개명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이름은 독일 통일 이후 다시 뮐하우젠으로 변했다. 반면, 루터의 고향 비텐베르크의 공식 명칭은 여전히 ‘루터’로 남아 있다. 독일 통일 이후 옛 사회주의 전통의 흔적이 하나둘씩 기억에서 지워지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독 시절 발행된 5마르크 지폐. 독일농민전쟁의 지도자 토마스 뮌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다시 동화 속으로.
날은 저물고 배는 고팠다. 숲속을 헤매던 네 마리의 길동무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집 하나를 발견했다. 다가가 창틈으로 엿보니 험상궂게 생긴 도둑들이 훔쳐온 보석을 쌓아두고 한바탕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다. 짐승들은 꾀를 냈다. 당나귀가 앞발을 창틀에 올리고 사냥개는 그 등에 올라탔다. 이어 고양이와 수탉이 차례로 올라섰다. 그들은 한꺼번에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괴물 소리 같았다. (…) 얼마 뒤 쫓겨났던 도둑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짐승들은 힘을 합쳤다. 수탉이 울어대면 고양이가 할퀴고, 사냥개가 깨물면 당나귀는 뒷발질쳤다. 도둑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네 마리의 길동무는 숲속 작은 집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현실의 농민들은 끝내 패배했으나 동화 속 네 마리 짐승을 기다린 운명은 정반대였다. 뮌처가 오래전 꿈꿨던,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필요에 따라 나눠 쓰는 ‘천년왕국’이 마치 숲속 작은 집에서 실현된 것처럼.
이 동화의 줄거리 흐름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건 네 마리의 짐승이 내지르는 ‘목소리’다. ‘음악대’로 상징되는 합주(합창)는 중요한 열쇳말이다. 목말 타듯 차곡차곡 등에 올라탄 당나귀와 사냥개, 고양이와 수탉은 한꺼번에 토해내듯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집안에서 흐드러지게 잔치를 벌이던 도둑들이 깜짝 놀라 도망간 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괴물 소리와도 같은 짐승들의 ‘합창’이었다. 얼마 뒤 집을 되찾으러 돌아온 도둑들과 맞서 싸울 때도 마찬가지다.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 ‘말’을 빼앗긴 농민들의 연대와 저항.
물론 <브레멘 음악대>를 두고선 전혀 다른 해석도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네 마리의 길동무 짐승들은 애초 도시의 음악대가 되려고 브레멘으로 향하고자 했으나, 도둑들로부터 숲속의 오두막집을 빼앗은 뒤엔 마음을 바꿔 이곳에서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냈다. 보기에 따라선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이상주의에 빠져들기보다 현재의 작은 성취에 감사하는 절제된 삶의 자세로 비칠 수도 있다. 이런 유의 해석은 힘을 합쳐 도둑들을 몰아낸 짐승들의 단체행동에서 저항이나 연대의 알레고리를 읽어내는 대신, 문제 해결을 위해선 궁한 자의 노력이 우선임을 강조하는 사례로 이 동화를 내세우기도 한다. 마치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식의 복음이라고나 할까.
어찌 보면 그림 형제가 남긴 동화집의 운명 자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초기 판본에 담겨 있던 거칠고 ‘민중적’인 정서와 언어의 흔적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산층/시민계층의 교양에 어울릴 법한 구성으로 순치되는, 말 그대로 도덕화의 경향이 뚜렷했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의 초기 판본에서 사악한 여자는 보통 가정의 엄마였으나, 후기 판본에 이르러 ‘계모’로 둔갑했다.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사악한 마녀나 계모에게 시달리다 결국엔 ‘엄마’ 품에 안기는 식의 중산층 신화의 색채는 갈수록 짙어졌다. 미국의 문화 제국 디즈니가 그림 형제의 동화를 유독 사랑한 사정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독일 튀링겐주의 프랑켄하우젠은 독일농민전쟁 당시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해 6000명 이상이 목숨을 읽었다. 사진은 프랑켄하우젠에 있는 독일농민전쟁 기념관. 독일농민전쟁기념관 누리집
그럼에도 1920년 한 수도원에서 발견된 그림 형제 동화집의 초기 원고들에선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의 급진적 모티브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를 채집한 중북부 독일의 카셀·파더보른 지역 일대는 숱한 전래동화를 남긴 ‘동화가도’(메르헨가도)와도 연결될뿐더러, 뮌처와 농민군의 저항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뮐하우젠·프랑켄하우젠 지역과도 그리 멀지 않다. 오백년 전 이 일대를 휩쓴 거대한 농민봉기의 함성을 머릿속에서 지우고선, 전래동화란 형태로 박제된 민초들의 정서를 오롯이 이해하기 힘들다.
패배의 상흔을 달래는 진혼곡
먼 길 떠난 짐승들이 마침내 이르고자 했던 ‘목적지’가 브레멘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브레멘은 이웃한 함부르크와 더불어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였다. 일찍부터 상업과 국제무역이 번성한 터라, 이미 중세 말기부터 봉건 권력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자치도시 지위를 꿰찼다. 브레멘 음악대는 13세기부터 이 도시에 ‘정규직’으로 실존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자와 사상의 교류가 활발한 항구도시이다 보니 급진적 사상도 움텄고, 그 흔적은 오래도록 이어진 편이다. 독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사에선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브레멘좌파’란 이름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주도의 스파르타쿠스단과 합쳐져 나중에 독일공산당(KPD)의 모태가 되는 집단이다.
현실의 독일농민전쟁은, 봉기한 자의 입장에서 봤을 땐 처절한 패배요 완전한 실패였다. 잔인한 진압과 살육의 집단적 기억은 300년 지난 19세기 중엽에 이르도록 이렇다 할 사회운동의 싹을 절멸시켰을 정도다. 영국은 물론이고 라인강 왼편(프랑스)에 비해 독일의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구체제가 늦게까지 유지된 배경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기에 해피엔딩으로 끝난 <브레멘 음악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무용담이라기보다는 외려 이름없이 스러져간 옛사람들에게 보내는 헌사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몇백년 동안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면서 패배의 상흔을 달래려는 진혼곡. 동시에 민초들의 입을 거쳐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 속엔 억압과 차별, 빈곤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향한 강한 열망이 숨쉬고 있다. 억눌린 자의 공감과 연대, 이들이 호흡 맞춰 내지르는 하나의 목소리가 새 세상을 여는 첫걸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