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10월13일 물가안정목표제 운영상황 설명을 위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다. 이날 간담회는 한은이 물가안정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열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 가장 중요한 책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중기적 시계에서 물가안정목표인 2%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도 한국은행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수준에 수렴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모두발언에서 말씀드렸듯이 한국은행의 가장 주된 (설립)목적은 물가안정이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물가가 그 목표수준에 수렴하도록 통화정책을 운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이 총재가 물가안정을 이루는 게 한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점을 분명히 한 뒤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동안 한은이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총재 발언은 상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4일 범금융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유일호 경제부총리(앞줄 오른쪽부터), 심재철 국회부의장, 이주열 한은 총재,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총재는 또한 “최근 수년간 공식적인 소비자 지표물가가 목표수준을 많이 밑돌았고 그에 따라서 통화정책 운용과 관련해 소통하는 데 대단한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론적으로 저물가가 장기화될 경우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저물가가 장기화되면 일반적으로 임금상승률 둔화로 연결돼, 가계의 소득증가를 둔화시키고, 소비를 위축시키는 경로로 작용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물가(상승률)가 하락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 둔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산유인도 좀 낮아지고 그에 따라서 투자가 저하되는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이 총재가 이 정도 얘기를 했으니 한은이 물가안정에 중점을 두고 통화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뒤 발언을 보면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만다.
11월11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를 보자. 이 총재는 “앞으로 통화정책은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완화 기조를 유지하되 금융안정에 각별히 유의해 운용해 나갈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내외 여건의 높은 불확실성과 그 영향, 그리고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 변화, 국내 가계부채 증가세 등을 면밀히 점검해 나가겠습니다.” 성장세 회복과 금융안정을 강조한 반면, 물가안정은 뒷전이다. 한달 전 발언과는 상당히 다르지 않은가. 성장세 회복과 금융안정의 중요성을 고려하더라도 통화정책 방향 제시 등에서 혼선을 줄 수 있어서 문제가 많다.
그는 12월15일 금통위 뒤 기자간담회에서도 “앞으로 통화정책은 성장세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완화기조를 유지해 나가겠지만 그 과정에서 금융안정에 한층 유의해 운용해 나갈 것입니다. 특히 대내 여건 변화와 금융·외환시장 움직임, 거시경제 흐름 등을 면밀히 점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특히 12월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는 성장에 방점을 두고 금리정책을 운용했지만, 앞으로 단기간은 금융안정에 좀더 유의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 물가안정이 최우선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좀더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4일 범금융 신년인사회에서도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얘기를 했다. “앞으로 상당기간 저성장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의 완화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성장세 회복을 뒷받침해 나갈 것입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 감독당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금융안정을 확고히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이 총재 발언들을 보며 왜 지난해 10월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 가장 중요한 책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등의, 지키지 못할 말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시장에서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무게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11월11일 기자간담회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미 연준은 … 고용과 물가 상황이 개선되고 있으며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12월 금리인상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을 강력히 시사해 왔습니다.”
연준이 설립목적인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을 주된 잣대로 삼아 통화정책을 펴고 있음을 에둘러 일러준다. 설립목적에 충실한 정책 결정은 일본중앙은행과 유럽중앙은행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은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한은이 어떻게 신뢰를 높이고 제대로 방향을 잡아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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