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창의여성연구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서울 대치동 구글캠퍼스의 한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있다. 한국창의여성연구협동조합 제공
“이래서 내가 애엄마들하고 일하기가 싫어요. 돈 주고 지 새끼들 사정까지 봐줘야 돼.” 어린 아이를 둔 엄마의 삶을 다룬 영화 <미씽>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직장 상사가 아이를 잃어버려 혼비백산한 워킹맘인 주인공에게 이런 독설을 던진다. 통계청의 ‘2016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여성고용률은 49.9%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특히 연령대별로는 25~29살(68.6%)과 45~49살(68.6%)의 여성고용률에 비해 35~39살(54.1%)이 상대적으로 더 낮다. 결혼·임신·출산·육아 등에 따른 경력 단절 때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곽정은 등이 펴낸 <여성의 일, 새로고침>이라는 책에는 남녀평등 교육을 받고 자란 20~40대 여성들이 일을 하며 겪게 되는 다양한 유리천장들과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이 생생하게 나온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늘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삶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은 정말 풀기 어려운 숙제일까?
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나선 조직이 있다. 한국창의여성연구협동조합이라는 사업자 협동조합이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모인, 일하는 여성들의 공동체이다. 조합원들을 국내외 석박사 학위를 갖춘 연구인력들이다. 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일을 그만두었지만 언제든 다시 예전 직장으로 복귀를 꿈꿨다. 하지만 화려한 학력과 경력에도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2014년 2월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새로운 일과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었다. 조합원들은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일거리를 가져가 주로 집에서 일한다. 팀장 주도 아래 2~3주에 한 번씩 회의를 열어 공동과업을 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2014년부터 미래창조과학부의 ‘R&D KIOSK 브리프 발간사업’을 3년째 수행하고 있으며,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지식공유체계구축’ 등 다양한 연구용역 성과를 내놨다. 창의여성연구협동조합은 서울시가 2014년에 발표한 ‘여성친화 일자리 10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추명자 조합 이사장은 “육아와 가사로 인해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길 때도 서로 최대한 배려하며 품앗이 노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경력단절 여성들이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프리잡(FreeJob) 플랫폼을 구축하려면 협동조합 방식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협동조합은 집단적 자기고용이다. 노동 환경과 조건을 함께 결정하고, 노동의 대가도 공평하게 배분한다. 협동조합은 태생적으로 평등을 핵심가치로 삼아왔다. 여성에게 유리한 일터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양도 바로 이런 가치에서 나온다. 일라이자 브라이얼리는 1846년에 이름을 올린 세계 최초의 여성 협동조합원이다. 1844년 설립된 영국의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은 조합원 자격에 남녀를 가리지 않아 2년 뒤 최초의 여성조합원을 가입시켰다. 영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이다. 정치적 남녀평등보다 협동조합의 남녀평등이 82년이나 앞선 셈이다. 2015년 세계 협동조합의 날 슬로건은 ‘협동조합을 선택하고, 평등을 선택하자’(Choose co-operative, choose equality)였다.
여성에게도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는 곳은 비단 협동조합만이 아니다. 시장을 통한 사적 이익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복과 지역사회 기여를 더 중시하는 사회적 경제 전체가 여성의 일과 가정의 양립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은 2015년에 발간한 <여성친화 사회적 경제 모델의 가능성 탐색>에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등 사회적 경제 분야의 조직은 민주적 운영과 지역밀착형 관계 등을 바탕으로 여성의 성장과 발전을 더 쉽게 구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사회적 경제가 여성들에게 대안적 경제공동체로서 자리잡기 위해 해결해야 과제들이 많다. 사회적 경제 기업 내에서도 다양한 방식의 유리천장은 존재한다. 지난해 12월10일 사회적 경제 조직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혁신’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서는 사회적 경제 분야의 여성들이 겪은 차별과 어려움의 토로가 쏟아졌다. 작은여행 허나윤 대표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기업은 탄력적인 근무시간 및 여성친화적인 조직문화, 공동돌봄 등을 통해 가사노동, 보육에 매여 있는 여성의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돌봄, 외식업, 수공예 등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고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직종에 집중되는 성별직종분리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고용불안정성과 저임금 구조가 반복된다”고 말했다.
업종별 편중과 영세성을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경제에서 다양한 여성 전문가가 육성되어야 한다. 사회적 경제에 특화된 여성 리더의 양성도 필요하다. 국내 사회적 경제 분야의 여성 종사자 비율은 60~70%에 이르는데,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에서 여성 대표자 비율은 각각 28.7%, 37.9%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가족부가 해마다 ‘여성가족형 예비 사회적 기업’을 지정하고 교육, 컨설팅 등을 지원하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효과가 없다. 형식적 지원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예컨대 여성가족부의 여성기업 인증제도를 들 수 있다. 여성기업으로 인증될 경우 공공기관의 의무 구매 및 창업지원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아직까지 여성이 대표로 있는 사회적 경제 기업에게는 제한이 있다. 여성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의 시행령은 상법상 회사와 개인사업자만 지원 신청 자격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가 2015년부터 여성기업 지원 대상에 협동조합 등을 넣자는 안을 내놓았으나 중소기업청 등 관련부처의 반발로 2년째 보류 중이다.
여성친화적인 대안경제공동체 구축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이구경숙 살림센터장은 “사회적 경제를 매개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대안적 경제의 장을 확장해가는 과정이며, 가정을 포함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살림살이 경제’로 나가는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주수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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