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를 (일찍)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규모의 재정을 빨리 투입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동안의 건전재정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조기졸업 했을 때 건전재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 요즈음은 참 걱정스러워요. 경제규모에 대비한 재정적자가 아직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통일 요인 등을 감안하면 더욱 걱정이 돼요. 재정하는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지난해 11월 나온 <코리안 미러클 4/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공직 생활의 많은 시간을 예산 관련 부처에서 보낸 김 전 장관이 지금의 재정 현실을 우려하며 건전재정 기조를 지켜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목소리를 내는 전직 고위 경제관료들은 여럿이다.
현직 예산 관료들도 선배들의 걱정 때문인지 재정 건전성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송언석 2차관은 작년 12월19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정부가 마무리될 때까지 국가채무 비율을 (국내총생산 대비) 40% 미만으로 관리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채무비율 40%는 정부가 나랏빚의 암묵적 마지노선 비슷하게 여겨온 상한선이다. 송 차관은 이어 국회가 재정건전화법안을 이른 시일에 논의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기재부는 지난주 17~21년 국가재정운용계획 수립을 위한 작업반 회의를 열었다. 18개 작업반을 중심으로 그간의 재정투자를 평가하고 앞으로 재정투자 방향과 재정개혁 방안을 마련한 뒤 내년 예산안 등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건전재정 기조가 작업의 바탕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재정부 송언석 2차관이 지난해 12월19일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기재부 누리집
그런데 나는 정부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건전재정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다. 김 전 장관 말마따나 나라 곳간 상태가 양호한 것이 외환위기에서 일찍 벗어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재정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을 봐도 그렇고, 통일 등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가 재정 건전성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다. 재정의 유연성을 떨어뜨려 경제여건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올해 예산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17년 예산안을 지난해 추가경정예산 대비 0.5% 늘어나도록 편성했다. 전반적인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과도하게 긴축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12월3일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얼마 안돼 성장률 하향 전망이 잇따르면서 추경 편성론이 나왔다. 결국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분기(1~3월) 동향을 보아가며 편성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힐 수밖에 없게 됐다. 재정 건전성에 너무 무게중심을 둔 후과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타당했다고 본다. 경기대응의 짐을 정부에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한 얘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총재는 10월8일 미국 워싱턴에서 “우리의 재정 건전성은 세계적으로 톱클래스다”라며 재정의 기능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2월21일에는 올해 예산이 “완화적이지 않다”는 점을 수치를 동원해가며 밝혔다. 국제통화기금도 지난해 몇차례 한국과 독일 등을 지목해 재정지출 확대를 권고했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110% 안팎)보다 크게 낮은 점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정부는 재정지출 증대를 통해 경기가 활기를 띠면 세수가 늘어 재정적자 확대분을 상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정흑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금리가 낮아 재정적자에 따른 이자 부담이 크지 않다는 점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정부는 재정을 유연하게 운용해야 한다. 그런데 재정건전화법 제정까지 추진하니 걱정이다. 전에 쓴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재정건전화법은 재정의 적극적인 구실을 막는 등 문제가 많다.
이제라도 법 제정을 보류하고 재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은 저성장 추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저소득층 삶이 팍팍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몇몇 지표의 의미를 꼽씹어봐야 할 때다. 건전재정을 추진하더라도 시의에 맞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그마가 될 수 있다.
이경 선임기자
jae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