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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지정학적 불황’, 트럼프 시대 세계경제의 운명?

등록 2017-02-10 19:59수정 2017-02-10 20:11

[토요판] 뉴스분석 왜?
트럼프와 세계경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이라는 기존 질서를 허물고 세계경제에 보호무역 강화와 통상 마찰이라는 새로운 위험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부산항 신항 부두에 접안한 컨테이너선에 수출 화물을 선적하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이라는 기존 질서를 허물고 세계경제에 보호무역 강화와 통상 마찰이라는 새로운 위험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부산항 신항 부두에 접안한 컨테이너선에 수출 화물을 선적하는 모습. 연합뉴스

▶ 글로벌 금융위기가 국제사회에 일깨워준 교훈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새 분노의 방향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고강도 긴축에 맞서며 생존권을 요구하던 ‘분노의 유럽’, 탐욕스런 금융자본을 겨냥한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등은 이제 각종 권위주의와 극우적 반동에 힘없이 밀려나고 있다. ‘하드 트럼프’의 부각은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 시대, 세계경제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

말 많고 탈 많은 트럼프의 공식 행보가 시작된 지 3주가량 지났다. 지난해 11월 당선 직후에 나온 그의 온건한 수락 연설에 힘입어 다소 희망스런 모습이 보이기도 했으나, 막상 취임 이후엔 해괴망측한 처신으로 일관해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최근 트럼프의 반이민 관련 행정명령은 ‘이민자 국가’ 미국 안에서 심각한 사회적 분열을 낳았다. 2월 초 <시엔엔> 설문조사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44%에 그쳐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취임 직후 여론조사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영국의 주간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트럼프 당선이 갖는 의미를 “역사의 부활과 복수”로 규정한 건 의미심장하다. 1980년대 말 구소련의 붕괴 이후 한동안 득세하던 ‘역사의 종말’론이 환상으로 막을 내리고, 다시금 역사가, 그것도 마치 복수를 하듯이 잔인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역사의 내용이나 성격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트럼프 당선 직후 발간된 <이코노미스트>는 표지 사진으로 그의 검은색 실루엣을 실은 바 있다. 그의 실체가 ‘먹통’이라는 얘기다.

시장에서는 트럼프를 흔히 “두 얼굴의 사나이”로 표현한다. 그의 기업친화적이고 대규모 재정을 동원한 적극적인 경기 부양 노력을 “소프트 트럼프”(온건한 이미지)로, 반이민과 보호주의적 행태를 “하드 트럼프”(거친 이미지)로 부르는 것이다. 당선 직후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규제 완화에 역점을 둔 그의 수락 연설은 ‘소프트 트럼프’에 대한 기대를 낳으며 한때 시장에서 이른바 ‘트럼플레이션’에 대한 열광을 낳았다. 트럼프에 경기부양·물가부양을 의미하는 ‘플레이션’을 합성한 단어로, 미국 주도의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것이다.

통화정책 약효 떨어진 선진국 경제
만성적 수요 부족으로 ‘장기정체’
중산층 붕괴가 사회적 갈등 키워
전후 ‘성장협정’ 깨진 게 주요 원인

미국에선 ‘하드 트럼프’ 측면 부각
선진국 최상위층이 부 독점했지만
불평등 확대를 ‘외부의 적’ 탓으로
‘체계의 혼돈’ 낳는 방아쇠 될 수도

하지만 이후 행보는 ‘하드 트럼프’ 측면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극우적이고 초자유주의적 인사 위주로 단행된 행정부 인사는 물론, 취임 직후의 반이민과 보호주의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조치 때문이다. 사실 트럼프가 당선 직후 강조했던 인프라 투자나 규제 완화는 상당 부분 미국 의회와의 협력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야당인 민주당(규제완화에 반대)은 물론이고 여당인 공화당(재정적자에 반대)에서조차도 제대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주로 본인의 재량 여지가 큰 행정명령을 남발하는 중이다. 그 결과 트럼플레이션 기대가 퇴조하면서 그의 정책 불확실성이 다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는 게 현재 모습이다.

‘경제의 뉴노멀’에서 ‘정치의 뉴노멀’로

트럼프의 소통 방식도 가히 충격과 전율 수준에 가깝다. 자신의 흠을 잡는 언론을 “가짜뉴스”로 매도하는가 하면, 취임식 인파에 대한 허무맹랑한 자찬을 “대안사실”이라 포장하면서 진실과 거짓의 구분법마저 허물고 있다. 사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2016년의 단어’로 “탈진실”을 꼽은 바 있다. 이미 선거 기간 트럼프의 행보에서 보듯,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이 부차화되고 신념이나 감정이 중요시되는 현상의 만연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도 트럼프 현상에 주목하면서 “탈진실의 정치 시대에 들어섰다”고 개탄한 바 있다.

비단 트럼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지난해 6월 세상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최근 프랑스를 필두로 선거의 해를 맞아 유럽 대륙에서 빠르게 번지고 있는 극우주의 열풍도 마찬가지다. 이밖에 러시아를 비롯해 터키, 이집트 등지에서 권위주의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실추되면서 일종의 대안 모델로 주목을 끌기도 했던 중국에서조차 시진핑의 1인 독재 강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과연 트럼프 시대에 세계경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우선 트럼프 시대가 맞닥뜨린 조건부터 따져보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과 저물가 기조가 장기화되는 건 전세계적 현상이다.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점차 ‘장기정체’론이 설득력을 얻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만성적 수요 부족으로 인해 통화정책 약발에만 의존한 거품으로 지탱되던 선진국의 경기가 장기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 내용이다. 한국도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선진국 경제 전반에 일반화된 일본식 장기불황 위험의 여파는 신흥국으로도 일피만파 번지고 있다. 신흥국의 주요 수출품인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의 저공비행이 이어지고, 그동안 세계화를 견인했던 무역도 극도의 침체를 거듭하는 탓이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크나, 그 실체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다. 기술혁신의 파괴적 동학을 고려할 때, 4차 산업혁명에 편승한 일부 부문의 막대한 기회에도 불구하고 정작 경제 전반의 부가가치 창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정보기술 혁신 등에 기반한 생산성 향상이 오히려 경제 전체적으로는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남는 것은 자본흐름의 변덕스런 속성 혹은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 심화뿐이다. 성장의 파이가 축소되는 가운데 그나마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과 투자 기회에 대한 집착이, 점차 한계에 직면한 주요국 통화정책의 엇갈린 행보와 맞물린 때문이다. 이른바 ‘경제의 뉴노멀’은 아직 혼돈의 아우라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지금은 경제를 넘어 정치에까지 뉴노멀이 확산되는 듯하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고 소득 불평등의 심화로 중산층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사회·정치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신흥국도 마찬가지다. 교역 급증 등 세계경제의 확대 재생산이 퇴보함에 따라 그간 고도성장 과정에서 억눌렸던 불만이 하나둘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양차 대전 이후 세계 주요국의 정치를 지탱했던 일종의 ‘성장협정’(자유주의·신자유주의)이 깨지면서 다양한 정치적 리스크를 양산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한다.

그 결과는? 경제적 박탈감과 결부되어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다양한 갈등이 정치의 뉴노멀을 맞아 마구 분출하고 있다. 현대 세계를 지탱하던 모종의 협정 혹은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인종이나 종교, 민족(종족), 문화 등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정체성의 정치학’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는 새로운 정체성 찾기에 다름 아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역사의 종말’이 패퇴하고 이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다시 득세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헌팅턴이 경계한 “야만”이 더 이상 비서구가 아니라 서구 자체에서 기세를 부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글로벌 리더십이 실종된 G-0 시대에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은 극도로 확대되고 본격적인 환율전쟁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옵션거래소에서 트레이더들이 거래 주문을 내고 있다. AFP 연합뉴스
글로벌 리더십이 실종된 G-0 시대에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은 극도로 확대되고 본격적인 환율전쟁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옵션거래소에서 트레이더들이 거래 주문을 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분노의 방향이 바뀌었다

특히 역설적인 사실은 금융위기 직후 순차적으로 새 희망을 보여주던 세계 각국에서의 분노가 이제 정반대 방향으로 전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스민혁명으로 대변되던 ‘아랍의 봄’, 또 고강도 긴축에 맞서며 생존권을 요구하던 ‘분노의 유럽’, 나아가 금융위기의 주범인 월가를 겨냥한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등은 이제 각종 권위주의와 극우적 반동에 힘없이 밀려나고 있다. 합리성의 위선을 벗기고 나니, 정작 심층의 혁명적 에너지보다는 오히려 잔인하고 폭력적인 본성만 기승을 부리는 꼴이다. 일찍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저자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번성을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의 균열, 대중의 반역적 정서에 내포된 취약성,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의 역설적 욕망으로 풀이한 바 있다. 현재와 맞닿는 문제의식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암흑시대 혹은 야만의 시대를 맞아 각자의 경쟁적 생존법은 국제적 차원의 새로운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역시 직접적인 방아쇠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보호무역과 반이민 조치들이다. 저가 수입품의 범람과 불공정 경쟁, 그리고 일자리 상실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중산층의 분노를 대변한다는 논리로 말이다. 트럼프, 나아가 영국의 브렉시트나 유럽의 극우세력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이러한 대중의 분노는 분명 경제적 기원을 지닌다. 이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바로 ‘코끼리 곡선’이다.

코끼리 곡선은 1988년부터 2008년 사이 구매력을 기준으로 평가한 각국의 실질소득의 증가율(y축)을 소득계층별(x축)로 비교해서 얻은 그래프다. 이를 보면, 주로 중국 등 신흥국 국민들로 구성된 세계 소득의 중간 계층은 실질소득 증가율이 80%에 이르는 반면, 정작 선진국의 중산층이라고 할 세계 소득의 중상위 계층은 실질소득이 감소하기도 하는 등 극히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진국 중산층의 분노가 중국 등과 같은 신흥 경제국에 쏠리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선진국의 부자들 위주인 최상위층도 60%의 높은 성장률을 보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선진국 중산층의 분노는 상당 부분 내부의 문제(양극화와 불평등 등)를 외부로 전가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이들이 잘못 겨냥한 초점은 국제적으로 갈등과 반목만 키울 따름이다. 오늘의 위기와 비견되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공황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계적 차원에서 공동 이해나 갈등을 관리하는 헤게모니의 쇠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헤게모니 국가 영국의 경우 의지는 있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반면 미국은 능력은 있었지만 의지가 없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국제적 권력 진공상태가 초래되면서 통상분쟁 심화와 환율전쟁(경쟁적 평가절하) 같은 악순환이 빚어진 것이다. 대공황 전후의 양차 대전도 실은 그 영향이다.

글로벌 리더십 실종된 ‘G-0’ 시대

‘팍스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의 퇴조라는 헤게모니 위기가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다. 사실 오늘날 반복되는 환율전쟁의 위험이나 금융 불안정성도 이처럼 헤게모니의 위기에 직면해 국제 통화·금융질서가 혼돈에 빠진 결과다. 그럼에도 아직 새로운 헤게모니는 손에 잡히지 않고, 이른바 ‘G-0’로 표현되는 글로벌 리더십의 실종 상태만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정치컨설팅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은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불황”이 도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헤게모니 순환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사를 조망한 조반니 아리기가 기존의 헤게모니가 붕괴되지만 새로운 헤게모니가 아직 출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기존 축적구조의 와해와 국가 간 질서의 붕괴가 결합된 최종적 위기, 즉 “체계의 카오스(혼돈)”가 초래된다고 진단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돌이켜 보건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소련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했다. 국민 혹은 대중의 경제적 토대나 실제 이해와는 무관한 상태에서 오직 헤게모니 쟁탈전에만 빠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였다. 물론 몽상과도 같았던 레닌의 이상은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아마도 이 슬로건은 이제 “보호주의 혹은 분리주의를 내부의 불평등 타파로”라는 식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우리가 현재의 위기 뒤편에 가린 초점을 제대로 겨냥하지 못하면, 체계의 카오스는 영구화될 수밖에 없다. 국제 기축통화들의 혼전과 금융 불안 확산, 그리고 주요 열강의 대립과 각종 퇴행적 움직임….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은 그런 위험에 우리가 좀더 가까이 가 있음을 경고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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