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연간 부가가치 29조6천억원·2015년)에 그친다. 2000년(3.8%)에 비해 절반이 줄었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질 정도로 농업 위상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물론 이는 문화적·환경적 가치 등을 지닌 농업을 그저 하나의 ‘산업’으로만 본 것이다. 우리 농업과 농민의 삶, 그리고 농촌지역사회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과 그후 잇따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농산물시장 개방 파고 속에 어떻게 변모하고 있을까?
예전에 비해 사뭇 달라진 농촌 풍경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있다. 농가의 연간 평균소득은 약 3722만원(2015년)인데 이 중에서 농업소득은 1126만원인 반면, 농외소득이 1494만원에 이른다. 나머지는 농업직불금 등 공적 이전소득과 보조금 등이 차지한다. 약 10년 전과 견주면 자가 영농으로 버는 농업소득은 2004년(1205만원)보다 줄었고, 농외소득(2004년 954만원)은 크게 늘었다. 농촌마을 주변의 제조업 취업 같은 이른바 ‘다면적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농외소득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마다 농사일만 하는 전업농은 10%대에 그친다. 일례로 전북 진안군 안천면의 경우 설문조사에 응한 100가구(가구원 251명) 중에 농업부문 임금취업자나 자영 상점 등에서 일하는 사람이 150명에 이른다. 또 농촌에서는 농민의 사회적 배제라는 현실의 ‘도전’에 대응해 마을협동조합을 꾸려 생활 필수서비스를 지역사회 스스로 해결하는 ‘응전’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3일 <한겨레>와 만난 김정섭(46)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제 일자리가 사람을 농촌으로 끌어들이는 중력장이고 농촌 정책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급소”라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최근 전국 1400여개 읍·면 중 5곳(경남 밀양시 단장면, 전북 진안군 안천면, 경기 가평군 상면, 충남 보령시 청소면, 경기 김포시 통진읍)의 다면적 활동실태를 포괄적으로 연구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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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특이점에 당도” “농촌 인구가 위축되고 감소하는 속도가 최근 정체되고 있다. 도시에서 일자리 등 경제 상황이 워낙 안 좋아 농촌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농촌은 지금 일종의 특이점 국면에 와 있다. 농촌 인구가 바닥을 쳐서 이제 다시 역전돼 증가세로 돌아설지 아니면 계속 줄어들게 될 것인지 어떤 분기점에 와 있는 느낌이다.” 그는 “물론 어느 쪽일지 예상은 어렵다”며, 2000년대 중반 이후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유입이 그 반대 방향의 유출보다 더 많아지면서 흐름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가 지난 20여년간 농촌지역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구하고 경험한 결과, 최근 분명하게 감지하는 희망은 ‘가족농의 유지·재생산’의 가능성이다. “잘 들여다 보면 농촌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징후들은 도처에 있다.” 그 대표적인 징후는 자가 영농 이외에 임시일용직 임금근로(농업·비농업) 취업이나 자영업 형태의 겸업을 영위하는 여러 ‘다면적 활동’이다. 2015년 농가경제조사 결과를 보면, 다면적 활동을 수행하는 농가 비율이 83.7%에 이른다. 완전 전업농은 16.3%에 그친다. “시장 개방으로 농산물 가격이 떨어져 농업이 열등화하고 농촌 빈곤화가 진행되면서 해방 이후 한국 농가의 전형인 ‘가족농’이 해체·와해될 우려가 계속 나오는데, 농업 이외의 여러 다면적 활동 기반이 오히려 가족농을 유지·재생산하고 나아가 성장시키는 경로를 가능케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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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농촌 중력장” 다면적 활동은 가족농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기회이자 농가의 중요한 살림살이 전략이다. “일자리는 모든 농촌 정책의 급소이고 인구를 끌어당기는 중력장이다. 농촌지역의 임금취업자 중 3분의 1은 농업에, 또 3분의 1은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다. 농촌 인구가 지역에서 덜 빠져나가도록 자가영농 외에 취업이든 자영이든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책이 우리 농업을 보호하는 길이다.” 농촌에서 일자리는, 신체에 비유하자면 가장 예민하고 작은 자극만 받아도 생리기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급소’라는 얘기다.
농촌 안에서 요즘 눈에 띄게 취업자가 늘고 있는 분야가 지역 내 각종 사회복지시설 서비스 일자리다. 농촌의 초중고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에 외부 강사로 일하는 사람도 2만명가량으로 추산된다. “농외소득 활동을 보면 60세를 살짝 넘은 고령농가는 주로 농업 일용노동자로, 50대는 복지시설 요양보호사로, 30~40대는 방과후교사로 많이 일한다. 평생학습센터강사 등 자격증을 대여섯 개 가진 농촌 사람도 적지 않다. 기존의 농촌 노동시장은 마을 도로를 닦거나 농공단지에 취업하거나 읍내 가게 운영이 중심이었는데 요즘엔 농가마다 더 다양한 다면적 활동에 접근할 기회를 찾으면서 스스로 활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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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농 경로 아니다” 농가 가계지출을 감당하는 소득원으로 농업소득을 늘리기는 매우 어렵다. 개방화로 농산물 가격은 끊임없이 떨어지고 농기계 등 투입재 가격은 반대로 뛰는 이중 압박으로 농가 교역조건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 ‘열등화’다. “우리가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 질서에서 탈퇴하지 않는 한 쌀 시장가격이 올라가고 정부도 가격 지지 정책을 펴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농외소득을 위한 다면적 활동은 전국 농가에 걸쳐 일반화된 현상이다. 농업소득이 높은 농가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다면적 활동은 임시·일용직, 시간제 등이 많다.”
한때 농촌정책 담당자들 사이에 영농 외에 피고용 취업노동자 등 다른 활동을 겸업하는 것을 ‘탈농’의 징후로 여긴 적도 있다. ‘가족농의 자립경영’이라는 농업정책의 이상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규모 있는 전업농’을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과거엔 ‘농사 이외에 다른 일도 하는 저 농가는 결국엔 농업을 때려치우고 도회지로 이사 갈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전업농과 겸업농 비율은 거의 절반씩으로, 별로 바뀌지 않았다. 농업이 열등화·빈곤화 경로를 밟고 있는 현실에서 다면적 활동은 탈농의 징후도 아니고 농민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농업 이외의 영역에서 일시적으로 일하는 건 농업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다. 농가 1호당 경지 면적을 늘리는 규모화와 전업농 육성을 통한 개방 파고 극복에만 몰두해온 2000년대 초까지의 농업정책이 오히려 탈농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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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열등화·빈곤화” 통계지표를 보면, 최근 10여년간 농업소득과 ‘자가영농 이외의 경제활동’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대등한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합쳤을 때의 소득을 보면 전체 평균 수준에 근접하는 농가의 비율이 크게 줄었다. 다시 말해 농가집단 내 소득 양극화가 진행되고 다수 농가의 소득이 감소하는 빈곤화가 진행되는 방향으로 농가 구성이 분화하고 있다. 1992년에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90% 정도였는데 지금은 60%에 불과하다.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농업소득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농촌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읍내 비농업부문 일자리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농외소득 일자리가 감소한 탓도 크다.” 요컨대 식량주권을 위해 일정한 규모의 농지를 유지하려면 적정 농가가 유지돼야 하고, 따라서 농촌에도 일자리를 둘러싼 ‘고용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농촌이 오히려 농촌답지 않다. 농업은 자연을 관리하는 활동인데, 휴경 농지가 많아지고 잡초가 자라는 농촌은 농촌 모습을 잃어간다. 농촌이 도시에서 해결되지 않는 실업이나 경제적 어려움의 출구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농촌이 그 모양새를 유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일자리가 마련돼야 한다.”
농가부채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까지 농업용 투자를 위한 부채가 많았으나 지금은 가계소비용 부채가 늘고 농업용 투자는 줄고 있다. 웬만한 농촌마다 농업소득에서 전망이 없는 터라 영농 투자가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농업 분야에 투입되는 국가 보조금은 연간 7조~8조원에 이른다. “농업은 1차산업이고 농산물도 시장 거래 상품이다. 하지만 농업·농촌은 그 밖에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굉장히 많은 의미를 포괄한다. 농업이 생산해내는 얼마 되지 않는 부가가치를 돈으로 따져 그 시장가치에 비례해 국가와 사회의 자원을 배분하려 들면 안 된다. 몇백 평에 불과한 소농의 경우 쌀농사 고정직불금으로 연간 7만원가량 받는데, 그 돈을 농사짓는 일의 가치를 국가와 사회가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의미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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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안의 집합적 활동” 다면적 활동은 개별 농가의 경제적 살림살이를 넘어 ‘농촌지역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메커니즘’이라는 사회적 의미도 띤다. “농촌의 여러 사회조직 활동 양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예전의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 같은 활동은 축소되거나 조직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 반면에 마을만들기, 커뮤니티 비즈니스,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같은 중첩되면서도 결을 달리하는 주민 참여 운동들이 농촌 내부에서 스스로의 내생적이고 집합적인 활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것도 다면적 활동 중의 하나다. 농업 이외의 여러 다면적 활동을 ‘사라질 운명’의 부정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농촌은 삶도 빈곤화 경향에 빠져 있지만, 마을버스, 도서관 등 교육문화·보건시설, 술집을 포함해 여가·휴식·쇼핑을 위한 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도 제대로 생산하거나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공적·사적 지원도 부족해 ‘사회적 배제’가 심화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도서관만들기나 방과후학교 수업위탁을 위한 협동조합 등 주민 스스로 이런 요구에 대응해 해결하려는 조직적 움직임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일고 있다. 다면적 활동은 ‘농업정책’에서는 농가소득 안정화를 위한 중요한 소득원이고, 동시에 ‘농촌정책’ 측면에서는 인구가 줄어들면서 지속 가능성 위기에 직면한 농촌지역사회를 인구학적으로 유지하는 성격을 띤다. 농가의 취업활동은 탈농을 예고하는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농민층이 소멸되지 않게 하고 가족농이 탈농할 확률을 줄이면서 농업·농촌을 유지하는 새로운 동력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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