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간 상견례 및 만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지난달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논란이 거세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변칙술’에, 우리 쪽은 재협상 합의는 없었다며 분명하게 선을 긋고 나섰다. 이번 논란을 문재인 정부가 무역협정의 틀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잘 모른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무역협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무역협정문에 대한 지식 부족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을. 그리고 미국 제조업 백인 노동자의 아우성에 자신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오바마 행정부가 서명한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을 날려버렸다. 바로 이런 식이다. 이런 확실한 행동을 백인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지지자에 대한 보답이다. 그에게 한국과의 무역협정은 그저 화끈하게 후려치는 모습을 보여줄 대상일 뿐이다.
트럼프는 틀렸다
언젠가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맺은 무역협정(나프타)을 끝내는 데에는 여섯 달이 걸리지만 한국과의 무역협정은 바로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강하고 화끈한 모습에 그의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백악관 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바로 옆에 두고 “우리는 무역협정을 재협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같은 날 백악관 루스벨트실로 자리를 옮겨서는 미국 우주위원회 발족 서명식을 하면서 느닷없이 “한국과의 무역협정이 만기가 다가오고 있으며, 실제로 몇 주 전에 만기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일련의 발언은 모두 무역협정문에 없는 이야기이다. 그가 만들어낸 것일 뿐. 그의 말은 틀렸다. 왜 틀렸는지 하나하나 따져보자.
첫째, 한국과의 무역협정을 바로 날려버릴 수 있다는 그의 말은 한-미 무역협정 24.5조의 내용과 전혀 다르다. 무역협정은 트럼프의 지시로 그날 종료되지 않는다. 완전히 종료하려면 6개월이 지나야 한다 조항은 나프타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틀렸다.
둘째, 무역협정에는 유효기한 날짜란 것이 없다. 어느 한 나라가 종료 조치를 밟지 않는 한 무역협정은 날짜를 기준으로 만기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틀렸다.
게다가 ‘재협상’이라는 그의 표현은 무역협정과 맞지 않다. 이미 발효한 협정의 내용을 고치는 협의는 재협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정 협의 또는 개정 협상이라고 부른다.
틀림으로써 더 보상받는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틀렸다는 사실은 그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틀림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으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변칙술은 일관된다. 그는 한국과의 무역협정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며 틀린 말을 내뱉음으로써, 한국을 아시아의 첫 셰일가스 도입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수십조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옆에 서 있는 자리에서, 이런 선물들을 직접 열거했다. 그는 공동성명 모두발언에서 한국이 ‘250억달러’어치 가스를 사주기로 했다고 직접 언급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문제의 ‘재협상’이라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미국 내부 행사를 진행하면서 무역협정에 만기가 있다는, 전혀 듣도 보도 못 한 말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손쉽게 한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문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재협상’ 합의는 정상회담의 내용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했을 정도다.
‘협정 종료’ 선언 6개월 뒤 실제 종료
폐지하거나 새 협정 맺거나 두 가지
트럼프, 협정 종료로 갈 가능성 있어
‘재협상’ 실제로 가능할 수 있기 때문
무역협정 성공했는지 여부는
일자리 및 가계소득 증가 따져야
경제민주주의·임금주도성장 위해
새 정부 무역협정의 틀 고민할 때
그렇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무역협정 재협상 합의는 없었다. 무역협정이 유효한 지금, 재협상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무역협정이 종료되지 않는 한 재협상 합의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무역협정이 살아있는 지금, 재협상 합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잘못된 장소에서의 잘못된 질문일 뿐이다.
무역협정에는 개정 협의 절차가 붙박이로 규정돼 있다.(22.2조) 한국과 미국의 통상 관료들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라는 기구에 이미 ‘개정을 검토할 권한’을 주었다.(22.2조 3항 다목) 그리고 어느 한 나라가 그 개정을 검토하는 ‘공동위원회’ 개최를 요구하면 상대방은 30일 안에 이 회의에 응할 의무가 있다.(4항 나목) 처음부터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쟁점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한번 더 강조하지만, 협정문 내용의 개정은 한국의 동의사항이다. 그러나 개정 교섭 개시 절차는 이미 붙박이로 내장되어 있으므로, 한쪽이 교섭의 개시를 요구하면 상대방은 응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협정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공동위원회는 어느 한쪽의 요구가 있으면 30일 이내에 소집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트럼프 행정부가 말한 협정 개정 협의를 위한 특별공동위원회이다.
그러므로 문 대통령의 참모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잘못 사용한 ‘재협상’이라는 낱말을 그대로 따라 사용한 점은 매우 아쉽다. 트럼프 대통령이 개정이라는 낱말 대신 재협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처음부터 그의 발언의 파괴력을 키우려는 노림수였다. 문 대통령의 참모들은 재협상이라는 단어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어야 했다.
종료 선언하면 재협상이 현실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그가 실제로 한국과의 무역협정 종료를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길이 그가 말한 ‘재협상’을 실제로 가능하도록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협정 종료를 선언하면, 기존에 맺은 무역협정은 6개월 후에 실제로 종료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과 미국 앞에 두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난다. 한쪽으로 난 길은, 6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두 나라가 서로 무역협정이 없는 관계로 가는 길이다. 반대편 방향으로 난 길은, 새로운 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명실상부한 ‘재협상’이다. 기존의 협정을 없는 것으로 날려버리고 새로이 진행하는 협상이다. 이렇게 되면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재협상은 현실이 된다. 만일 내가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무역협정 종료를 선언할 것이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통상 관료들이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통상 관료들이 만든 ‘지고지선 FTA’ 감옥
아마도 한국의 통상 관료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거칠게 말한 ‘재협상’이 잘못된 낱말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실은 개정 협의임을 알았을 것이다. 또한 개정 협의 절차가 기존 협정문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통상 관료들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재협상’ 개시에 합의한 바 없다는 점을 중요한 메시지로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데 급급했다. 한국이 셰일가스를 사주고 미국에 투자를 약속했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재협상이라는 터무니없는 낱말을 사용하면서 협정 개정을 요구했다. 협정 개정 요구를 막아보겠다는 전략은 오류이며, 분명 실패했다.
그러나 통상 관료들은 객관적으로 명백한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협정이 살아있는 지금에서는 허구적 개념인 ‘재협상’ 위에 모래성을 높이 쌓고 있다.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재협상을 합의해주지 않았다며 허수아비를 높이 쳐든다. 하지만 그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보낸 개정 협의 공동위원회 소집 편지가 이미 들어 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곳에서 이 편지를 뜯어 볼 것이다.
2007년 4월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타결된 직후 김종훈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가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나는 2006년부터 목격했다. 참여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통틀어 통상 관료들은 자신이 만든 무역협정이 항상 성공했다고 국민에게 알렸다.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언제나 ‘윈윈’(Win-Win)이었다. 그들에게 무역협정은 지고지선의 금과옥조이다. 그러니 한 획도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역협정이 성공했는지는 일자리와 가계소득이 얼마나 늘었는지 하는 핵심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반면, 통상 관료들에게는 모든 무역협정에 대해 언제나 성공 판정을 내리는 무역량 증가라는 잣대 하나만 있다. 그래서 감옥이다. 그 모래성에서는 무역의 이익이 고루 나뉘는가라는 핵심 질문은 불온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통상 관료들이 만든 감옥의 실체를 알아차리게 됐다. 휴대전화 요금을 낮추려는 새 정부의 정책이 무역협정의 국제중재회부권(ISD) 앞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깨끗한 환경을 위해 저탄소차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려던 법률조차 협정의 자동차세 조항 때문에 캄캄한 창고 속에 갇히는 것을 목격했다. 재벌 중심 경제를 누그러뜨릴 ‘중소기업적합업종제’를 전면 실시하지 못하는 것도 무역협정 때문인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2011년 11월2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당시 국회 부의장(왼쪽 위 마이크 든 사람)이 기습적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야단 의원들이 의장석에 몰려가 항의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사정이 이런데도 낡은 무역협정의 감옥은 여전히 국민을 가두려고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재벌경제 적폐를 국제법적으로 뒷받침한 낡은 무역협정의 위세는 아직 건재하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다. 무역협정에 관한 한 틀린 이야기를 하는 그가 더 많이 보상받는 까닭은, 바로 관료들이 만든 지고지선 에프티에이(FTA) 감옥의 건재에 있다. 한국 사회가 이 감옥에서 서둘러 나오지 않는 한,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나 이길 것이다. 분명, 그는 틀림으로써 더 보상받을 것이다. 그는 협정 종료를 선언하거나, 선언하겠다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우리로부터 더 가져갈 것이다. 일자 일획도 고칠 수 없는 ‘지고지선 한-미 에프티에이’라는 도그마는 결국 미국의 이익과 정확히 일치한다.
‘문(Moon) 에프티에이’ 가 필요하다
우리의 무역협정 모델이 필요한 때다. 국제 통상과 국내 경제사회정책이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한국의 모델과 한국의 사회 가치를 정립하고 이를 국제 통상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정부의 경제 철학을 담을, 말 그대로 ‘문(Moon) 에프티에이’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표적인 중소 상공인 공약으로 제시한 생계형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를 무역협정에 담아야 한다. 국제중재회부권은 폐지해야 한다. 그래서 경제 정책, 부동산 정책, 환경 정책 그리고 지역분권 정책의 자율성을 이제라도 원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새로운 무역협정은 경제민주주의와 임금주도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환경과 노동 조항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중국과의 협정을 예로 든다면 미세먼지 방지 정책을 실질적으로 협의하고 성과를 내는 협정이어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 협약 비준도 담아야 한다.
무역협정에 관한 한, 트럼프는 틀렸다. 적어도 틀림으로써 더 보상받는 일만은 안 된다.
송기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