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시절엔 소비활성화대책이란 이름으로 단기 부양책이 자주 활용됐다. 사진은 2016년 10월 진행된 ‘코리아세일페스타’ 기간 중 서울 시내 한 백화점의 모습.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김경락 기자입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오가며 금융정책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저녁에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만나서 2시간가량 나눈 이야기는 이미
보도를 했으니만큼, 당시에 대화를 하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여기에 소개할까 합니다. 일종의 인터뷰 후기입니다.
홍 수석의 이야기 중 “단기 경기관리 정책은 가급적 하지 않고 질적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대목이 가장 귀에 들어왔습니다. 성장 그 자체를 정책 목표로 삼기보다 ‘성장의 내용’을 바꿔나가겠다는 취지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홍 수석은 “(수출 중심의) 외끌이 성장에서 (수출과 내수가 함께 가는) 쌍끌이 성장을 유도한다”거나 “성장의 온기를 모든 계층이 골고루 느낄 수 있게 하겠다”고도 했습니다. 모두 같은 맥락 위에 있는 말들입니다.
사실 그간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중장기적 시계보다는 단기적인 경기 지표 개선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제인 상황에서 정치권력이 멀리 내다보는 정책을 달가워하지 않는데다, 정부 지지율도 단기 지표에 따라 출렁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환율 정책’을 폈습니다. 외환시장에 개입해 원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줘 성장을 도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어도 드넓은 외환시장에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는 격이었지만 1~2년 동안 이 정책은 이어졌습니다. 이 정책은
물가 불안과 양극화라는 후유증을 남겼죠.
박근혜 정부에서는 좀더 자주
단기 부양책이 쓰였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여러 차례 열어 기업들에 투자 집행을 앞당기도록 요구했습니다. ‘소비활성화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차에 붙는 세금을 깎아주거나 유통업체들의 팔을 비틀어 대규모 바겐세일 행사(코리아세일페스타·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를 기획하기도 했지요. 이런 대책이 집행될 때는 소비가 반짝 살아났으나, 얼마 안 가
‘소비 절벽’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1400조 가계부채’ 폭탄을 키운 2014년 가계 대출 규제 완화도 경기의 단기 부양을 의도한 정책이었죠.
후유증을 남기고 경제에 골병을 가져다주는 단기 부양책은 쓰지 않겠다는 홍 수석의 말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단기 경기 관리’에 신경을 덜 써도 되는 경제 환경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사실 앞선 정부가 단기 부양책을 거듭 내놓은 것은 당시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가 불어오면서 한국도 언제 이 회오리바람에 휩쓸려나갈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위기가 한풀 꺾인 뒤에도 경기는 6~7년 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위태한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오늘날 갖은 비판을 받는 2014년 가계 대출 규제 완화도 흔히 경제를 잡아먹는 괴물에 비유되는 디플레이션(지속적 물가 하락 현상) 공포를 배경으로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정책 당국자들은 후유증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자는 정서가 강했지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이라는 긴 터널에서 막 빠져나오면서 수출 부문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전임 정부가 재정 보수주의에 빠져 허리띠를 바싹 졸라맨 터라 경제가 어려울 때 쓸 실탄인 재정 여력도 풍부합니다. 덤으로 올해 한국 경제를 옥죄던 한-중 갈등도 서서히 풀려나가고 있죠. 한국은행은 한-중 갈등이 개선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내년 성장률을 올해보다 조금 낮은 2.9%로 내다본 바 있습니다. 현 정부는 일종의 ‘여유’를 갖고 있는 셈이죠.
지난해 4월 국제통화기금(IMF)이 낸
보고서가 기억이 납니다. 중장기적 경제 체질을 바꾸는 구조개혁 정책은 반드시 경제 주체의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경기가 회복기에 올라설 때 써야 한다는 게 이 보고서에 담긴 연구 결과입니다. 이 보고서대로라면 경기가 회복기에 들어선 현재가 바로 그때입니다. 홍장표 경제수석이 스스로 다짐한 대로 단기 경기 대책 마련에 급급해하지 말고 재벌 중심 경제구조나 소득 불균형 등 한국 경제의 오래된 숙제를 풀 수 있는 구조개혁 정책들이 꾸준히 입안되고 추진되길 기대합니다.
김경락 경제에디터석 정책금융팀 기자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