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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배순훈 “외환위기 ‘인간중심’으로 봤더라면 대량실업 피했을 것”

등록 2017-12-09 10:07수정 2017-12-09 11:57

[토요판] 커버스토리
‘대우맨’ 배순훈이 말하는 외환위기 20년

1997년 가을. 대한민국은 초유의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구제금융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긴축과 구조조정을 ‘담보’로 내놓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 것 같던 한국 경제는 2년 뒤 대우그룹 부실이라는 태풍에 또다시 휘말려 들어갔다. 외환위기의 상처를 간직한 정부는 대우 해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외환위기로부터 20년. 2017년 12월 한국 사회는 204억달러에서 3872억달러(2017년 11월 기준)로 불어난 외환보유액으로 상징되는 장밋빛 지표들을 내세워 ‘외환위기 극복 20년’을 조명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의 주체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해 보인다. 위기 극복을 위한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삶의 뿌리가 뽑히는 고통을 겪었다. 위기의 상징과도 같은 ‘대우맨’ 출신이자,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연이어 국정에 참여한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전 대우전자 회장)은 “외환위기를 ‘인간 중심’으로 보았다면 정부가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근본 의문을 제기한다.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외환위기 때처럼 노동자의 고통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를 통해, ‘외환위기 20년’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고민해봤다. 글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97년 가을. 대한민국은 초유의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구제금융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긴축과 구조조정을 ‘담보’로 내놓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 것 같던 한국 경제는 2년 뒤 대우그룹 부실이라는 태풍에 또다시 휘말려 들어갔다. 외환위기의 상처를 간직한 정부는 대우 해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외환위기로부터 20년. 2017년 12월 한국 사회는 204억달러에서 3872억달러(2017년 11월 기준)로 불어난 외환보유액으로 상징되는 장밋빛 지표들을 내세워 ‘외환위기 극복 20년’을 조명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의 주체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해 보인다. 위기 극복을 위한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삶의 뿌리가 뽑히는 고통을 겪었다. 위기의 상징과도 같은 ‘대우맨’ 출신이자,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연이어 국정에 참여한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전 대우전자 회장)은 “외환위기를 ‘인간 중심’으로 보았다면 정부가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근본 의문을 제기한다.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외환위기 때처럼 노동자의 고통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를 통해, ‘외환위기 20년’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고민해봤다. 글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의 이력은 독특합니다. 대우의 전성기 ‘탱크주의’ 전도사에서 디제이(DJ) 정부의 정통부 장관으로, 다시 참여정부의 동북아중심경제추진위원장까지. 기업과 정부, 학계를 오가며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의 한국 경제 현장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에게서 대우 해체라는 아픈 상처와 외환위기 20년을 맞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외환위기를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았다면, (김대중) 정부가 그렇게(대량 실업자가 발생하도록) 처리했을까요?”

지난달 30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배순훈(74) 전 정보통신부 장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배순훈은 이른바 ‘대우맨’ 출신이다. 18년간 대우그룹에서 고교 선배인 김우중 전 회장과 호흡을 맞춰왔다. 1999년 당시 재계 순위 2위였던 대우그룹의 해체는 외환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가 싶던 한국 경제에 또다시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대우맨’을 거쳐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에 힘을 보탰던 배순훈의 머릿속엔 지금 어떤 그림이 담겨 있을까? <한겨레>가 외환위기 20년을 맞아 그를 만난 이유였다. 하지만 배순훈은 인터뷰 시작부터 ‘노동의 관점에서 본 외환위기’라는 예상 밖의 화두를 던졌다. “20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안 보이던 일이 이제야 보입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도 ‘인간 중심’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나요?”

“공급자(중소기업)는 많은데 수요자(재벌)는 한두 개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적절히 규제하지 않고, 시장원리에만 맡기면 중소기업은 죽게 돼 있어요. 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깨야 합니다.” ‘대우맨’ 출신으로 외환위기 전후 기업과 정부를 두루 오가며 한국 경제의 현장을 체험한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역할은 외려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배 전 장관이 11월30일 오후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배순훈은 1997년 3월 대우를 떠나기 직전까지 대우전자 회장을 맡고 있었다. “갑자기 김 회장이 회의를 소집하더니 경영자들에게 모두 해외로 나가 회사를 하나씩 맡아서 창업하라고 했어요. 다들 회장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더군요. 나는 아이쿠, 회사를 떠나라는 얘기로구나 생각하고, 사표를 냈죠. 김 회장이 크게 화를 내더군요.” 그는 외환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그해 가을과 겨울 시기 국내가 아닌 프랑스에 있었다. 파리에서 아예 살 생각으로 집까지 구했다. 그러던 어느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장관 할 생각 없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슨 자리냐고 물으니까 아직 정해지지 않았대요. 야당을 40년 이상 하다가 대통령이 된 분이 왜 나에게 그럴까 궁금했어요.”

90년대 중반 ‘탱크주의’ 신화 주인공
18년간 김우중 회장과 손발 맞춰
정통부 장관 거쳐 참여정부 때도 활동
세계 최초 ADSL 기반 마련한 공로

손쉬운 해고 길 열어준 ‘노동개혁’
5개 대우계열사에서만 2만여명 실직
“혹독한 긴축과 구조조정 약속은 잘못”
“대우 해체 피하면서 실업 면했다면…

1997년 말 영업정지로 셔터가 내려진 한 종합금융사 건물에 피해자들이 몰려와 있는 모습.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1997년 말 영업정지로 셔터가 내려진 한 종합금융사 건물에 피해자들이 몰려와 있는 모습.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배순훈은 귀국해서 대통령에게 정보통신부 장관 임명장을 받은 뒤 직접 이유를 물었다. “이번 정부는 야당을 오래 해서 국민의 신뢰가 높지 않기 때문에 나같이 언론에 알려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능력보다 정권의 이미지 개선용으로 뽑았다는 솔직한 얘기였다. 그럴 만도 했다. 배순훈은 90년대 중반 대우전자 사장 시절 경쟁업체들이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강조할 때 역으로 ‘탱크주의’로 치고 나갔다. “더욱 튼튼하고 기본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콘셉트의 광고는 당시 화제를 모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정통부 장관 시절엔 한국이 오늘날 정보통신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아이디시(IDC. IT 분야 시장분석기관)가 매긴 한국 순위가 당시 22위였는데, 5위까지 올려보겠다고 대통령에게 약속했어요.” 정부·여당과 기존 전자업계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지원으로 세계 최초로 전화선을 이용한 초고속통신망(ADSL)을 깔 수 있었다. “전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라는 게 동영상 전달이 잘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모두 에이디에스엘 투자에서 시작된 거예요.” 그 공은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배순훈은 지난 4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시상식에서 개인공로상을 받았다. 19년 만의 일이다.

1996년 11월19일 프랑스 국회 관련위원회에 참석한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 파리/AFP 연합뉴스
1996년 11월19일 프랑스 국회 관련위원회에 참석한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 파리/AFP 연합뉴스
`빅딜 반대’ 보도로 1년도 안 돼 중도 하차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재벌은 금융기관과 함께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꼽힌다. 금융기관들은 해외로부터 단기자금을 과도하게 들여와 위험한 고수익 상품에 투자했다. 또 재벌의 방만한 투자를 방치하며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하다가 외국자본이 빠져나가자 직격탄을 맞았다. 재벌의 행태도 뒤지지 않았다. 재벌은 외부차입에 의존해 무리하게 확장전략을 썼다. 실적 악화와 더불어 금리상승과 조기상환 요구가 맞물려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서 연쇄 부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아이엠에프)은 1997년 12월 한국 정부에 긴급 자금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재정금융의 긴축과 함께 기업 구조조정과 투명성 제고 등의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해외사업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영’을 계속 고수했다. 외려 1998년 초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확장전략에 집착했다. 배순훈은 이 부분을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대우는 정부의 산업구조조정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신속히 자체 구조조정을 단행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김 회장은 환율만 오르면 수출이 잘될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했죠.”

1997년 12월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표지.
1997년 12월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표지.
빚을 얻어 빚을 갚는 악순환을 거듭하던 대우는 곧 한계점에 도달했다. 배순훈은 김 회장에게 대우 해체를 막기 위한 고언을 했다.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거나, 자동차 사업을 계속하려면 다른 것을 모두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화를 내더군요.” 대신 김 회장은 정부가 조금만 도와주면 살아날 수 있다며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정부의 구조조정 책임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부는) 김 회장의 확대개편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것은 아이엠에프와의 재협상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구석에 몰린 김 회장은 해외출장 명목으로 출국해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우는 1999년 8월 워크아웃이 결정되면서 본격적인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23조원 규모의 분식회계까지 드러나 국민의 공분을 샀다. 피해를 본 소액주주만 37만명에 이른다. 대우에 엮여 부실화된 금융기관에는 약 30조원 규모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파장은 컸다.

대우의 위기가 깊어가던 1998년 말. 배순훈은 취임 1년도 안 돼 장관직에서 중도 하차하고 만다. 사단은 언론의 `빅딜 반대’ 보도였다. 김대중 정부는 산업구조조정 차원에서 대기업 간 사업을 맞교환하는 이른바 빅딜을 추진했다. 대우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고, 삼성은 대우전자를 인수하는 협상이 진행됐다. 배순훈은 1998년 11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세미나장에서 기자들로부터 빅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개인 생각을 밝혔다. “빅딜이 대기업들 간에 사업을 주고받아 단순히 ‘부채 교환’을 하는 것은 (부채 총량의 감소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엠에프가 권고한 산업구조조정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빅딜 반대’라고 크게 보도했다. “발언 취지가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조선일보>는 무시하더군요. 12월말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해명을 요구하길래 설명했죠.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임 기사가 신문에 실렸어요. 다음날 후임자가 결정됐고요.” 대우와 삼성의 빅딜은 안팎의 비난 여론 속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함께 580억3500만달러의 긴급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됐음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함께 580억3500만달러의 긴급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됐음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엠은 실력이 전혀 없는 회사지만…”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개혁’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강도 높은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외환위기 전후로 쓰러진 기업을 모두 합치면 30대 재벌 중 절반이 넘는 16개에 이른다. 금융권에서도 33개 은행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16개가 합병·인가취소로 간판을 내렸다. 종합금융·보험·증권·저축은행 등 비은행권 금융사도 2103곳 중 913곳이 사라졌다. 김대중 정부는 또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손쉽게 해고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차가운 길거리로 내몰렸다. 참여연대 조사에 따르면, 대우 해체로 인해 직장을 잃은 노동자만 수만명에 이른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12개 대우 계열사들의 경우,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임직원이 많게는 62%에서 적게는 20%씩 줄었다. ㈜대우,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대우자판, 오리온전기 등 5개 계열사에서만 2만1500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김대중 정부는 고용보험 등 사회복지정책을 강화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이 더 악화된 것은 노동자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배순훈은 김 회장도 이 점을 걱정했다고 말한다. “아이엠에프 주문대로 구조조정을 해서 축소경제로 가면 실직자가 너무 많아지고, 환율 인상으로 인한 물가 상승으로 국민이 힘들어진다고 봤어요.”

1999년 4월19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서울 남대문로 대우빌딩 본사에서 그룹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1999년 4월19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서울 남대문로 대우빌딩 본사에서 그룹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이 대목에서 배순훈은 정부가 좀더 신중하게 대안을 모색하고 국민의 이해를 바탕으로 결정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만일 김대중 정부가 김 회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아이엠에프 사태 이전의 관행처럼 삼성차와 대우차의 합병에 3조원 정도의 여신지원을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우가 당장 해체되는 일을 피하면서 대우 계열사의 대대적 구조조정이 필요 없었을지 모르고, 대우 직원들의 대량 실업을 면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 배순훈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김 회장이 틀렸다고 칩시다. 그런데 대우 해체를 해서 결과가 어땠냐는 거예요. 결국 국민이 손해를 본 것 아닙니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산으로 가고, 서울역으로 가고…. 그리스 같으면 폭동이 일어났을 텐데,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를 했어요. 정부가 노동자와 가족의 고통을 생각했다면, 대우 처리에도 보다 신중을 기했을 것입니다.” 배순훈은 미국의 사례도 거론한다. “미국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용을 이유로 크라이슬러와 지엠(GM)에 막대한 돈을 풀어 살리지 않았습니까? 시장경제를 한다면서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죠. 내가 보기에 지엠은 실력이 전혀 없는 회사지만, 미국으로서는 살리는 게 좋다고 본 것이죠. 한국도 같은 처방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의 이야기에 허점이 없는 건 아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한국 정부가 다른 선택을 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설령 한국 정부가 대우 지원을 하려 해도 아이엠에프는 고강도 긴축과 구조조정을 약속한 것과 위배된다며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배순훈도 그 점은 인정한다. “아이엠에프 등 국제 금융시장의 반발로 국가신인도는 하락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외환위기가 불거지면서) 국가부도 위기 상황으로 몰렸을지 모르죠.” 당연히 다른 부실기업과의 형평성이 쟁점이 됐을 게 틀림없다. 부실경영 책임자인 김 회장에 대한 또 다른 특혜라는 지적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배순훈은 당시 정부 안에서 ‘김우중을 배제한 대우 살리기’ 방안이 논의됐다고 귀띔했다. “김 회장이 물러나고, 대신 대표성 있는 전문경영인 중심으로 정부 지원을 받아 대우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 내부에서 제기됐죠. 구체적으로 이경훈 전 ㈜대우 회장과 내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는데, 나는 생각 없다고 했어요.” 결국 이 방안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아마도 김 회장이 강하게 반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배순훈은 다시 한번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 회장이 자기 생각은 숨기고, (대우를) 줄이겠다는 시늉을 해서라도 정책결정권자들과 타협했어야 해요. 나는 잘못한 것 없다고 무조건 버틴 게 잘못이죠. 원래 기업가들이 자기 성공에 도취해 수정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망한 사례가 아주 많아요.” 배순훈은 대우전자 매각이 무산된 일화도 털어놨다. “정통부 장관을 그만둔 뒤인데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이 대우전자를 팔아달라는 요청을 해왔어요. 미국에 직접 가서 10억달러 정도로 가격 협상을 했죠. 김 회장에게 보고했는데 (가격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성사가 안 됐어요.”

1998년 1월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스포츠 스타들. 왼쪽부터 문경은, 정은순, 신진식 선수. 오른쪽 서 있는 이는 김세진 선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1월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스포츠 스타들. 왼쪽부터 문경은, 정은순, 신진식 선수. 오른쪽 서 있는 이는 김세진 선수다. <한겨레> 자료사진
“산업혁명 때 적응 못한 노동자들 큰 고통”

그럼 배순훈이 생각하는 적절한 외환위기 해법은 무엇일까? 그는 근본적으로 아이엠에프에 긴급차관 지원 조건으로 혹독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하기로 약속한 것을 문제점으로 들었다. “당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와 루디거 돈부시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가 대우에 자문을 했어요. ‘한국은 근본적으로 경제가 좋다. 혼자 살아날 수 있다. 만기 전에 빚을 갚으라고 하면 멀쩡한 나라도 견디기 힘들다. 한국 정부가 신인도 하락 리스크를 고려하고라도 만기까지 부채상환을 거절하고, 기업은 직접 채무조정을 협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김 회장도 한국 정부가 버티면서, ‘배 째라’ 식으로 나갔으면 (아이엠에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도) 살아났을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1998년 전경련 회장을 맡았을 때는 500억달러 무역수지 흑자가 가능하니까, 빌린 외채를 모두 갚으면 된다고도 했죠.” 실제 한국은 1998~2000년 3년 동안 7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배순훈은 경기고 한 해 선배인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이런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1998년 외환위기를 맞자 모라토리엄(지급 유예) 선언을 한 뒤 회생에 성공했다. 물론 한국처럼 작은 개방경제는 자원대국인 러시아와 달리 회생이 쉽지 않다는 반론도 많다. 배순훈은 동의하지 않았다. “펠드스타인 교수 등은 한국이 독자생존할 수 있다고 봤어요. 이후 아이엠에프의 구조조정 요구가 꼭 옳았는지 비판이 제기됐잖아요. 아이엠에프도 이에 대해 분명한 답을 못했고요.”

외환위기로부터 꼭 20년. 많은 경제전문가들이 한국 경제를 걱정한다. 장기 저성장, 가파른 가계부채 증가 등 여러 위험요인이 자주 지적된다. 전경련은 경제전문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응답자의 68%가 향후 5년 내 한국 경제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배순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공학자로서 기업과 정부를 오가며 한국 경제의 현장을 두루 체험한 그의 지금 고민은 산업이나 기업보다도 노동 쪽에 닿아 있다.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 외환위기 때처럼 노동자들이 또 고통을 받게 될 겁니다.” 배순훈은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과거 산업혁명 시기에 자본가들은 돈을 벌었지만 산업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큰 고통을 겪었어요. 한 예로 1차 산업혁명 때 증기기관을 이용한 면직물 산업 발달로 자본가는 막대한 이윤을 얻었죠. 하지만 노동자들은 제대로 적응을 못 하자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 운동)까지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배순훈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사람의 일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만 하는 일이 달라질 뿐이라는 얘기다. “과거에는 기계자동화로 일자리가 없어졌죠. 하지만 앞으로는 기계를 제대로 쓰기 위한 일자리가 중요하게 될 겁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에이아이가 공장을 다 돌리고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진다고 해요. 그러면 사람이 없는 무인공장이 잘 돌아갈 것이냐? 나는 안 돌아간다고 봐요. 결국 사람의 손이 필요해요. 다만 사람이 하는 일이 달라지는 거죠. 4차 산업혁명에서는 기계자동화로 상품이나 서비스의 고객만족도(고객감동)를 획기적으로 높일 텐데, 사람은 기계 작업을 인성에 맞게 조정하는 일을 해야 돼요. 새로운 스킬 세트가 필요합니다.” 그는 4차 산업혁명(자동화) 시대의 노동 위기에 대처하려면 정부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때마침 문재인 정부가 ‘사람 중심 경제’를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것에도 주목한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 기술 개발만 강조할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에 힘써야 합니다. 인간 중심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수준의 획기적인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기반(인프라)을 준비해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재벌은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급성장했다. 배순훈은 정부의 특혜를 받아 성장한 재벌은 사실상 ‘국가 소유’라는 과감한 주장까지 펼쳤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정책에 따라 여신을 제공했고 민간기업은 과도한 부채를 가지고도 고도성장을 했습니다. 정상적인 금융시장에서는 지급 능력이 없어 돈을 빌릴 수 없던 기업들은 정부의 배려로 대규모 자금 지원이라는 특혜를 받아 성장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국가 소유인 거죠.”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총수의 사생활까지 간섭했다.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 하와이에서 골프를 쳤는데 회장도 몰랐어요. 그런데 청와대에서 이것을 알고 알려왔죠. 김 회장은 하와이에 전화해 당장 귀국하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재벌이 총수 소유가 아니었던 거죠. 회삿돈이 총수 개인돈이 아니고, 국가의 돈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 보자면 총수는 일종의 전문경영인이었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수는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벌이 사실상 국가 소유라는 인식은 전두환 정권까지도 이어졌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의장으로 있던 국보위로부터 한국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양행을 포기하도록 종용을 받았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직접 국보위를 찾아가 개인재산을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죠. 그러자 권력 실세 중 한 사람이 ‘현대양행이 국가 것이지, 왜 당신 것이냐’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결국 현대양행을 포기했습니다.”

‘기업이 총수 소유물’ 인식 널리 확산
“재벌 2, 3세 승계하려면 능력 보여야”
DJ 정부 이래의 재벌개혁 성과 부족
외환위기 이후 정부 역할 더 중요해져

한국 경제 진짜 위기는 ‘노동’ 부문
“과거 산업혁명 때 자본가는 돈 벌어도
변화 적응 못한 노동자는 큰 고통 겪어”
“정부, 기술개발보다 교육·훈련 힘써야”
“이재용 부회장, 아직까지 보여준 것 없다”

권위주의 정권이 절차와 제도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기업을 쥐락펴락한 것 자체를 두둔할 순 없다. 문제는 권위주의 정권이 사라진 이후 이번엔 재벌이 마치 총수 개인 소유물이라는 정반대 인식이 빠르게 퍼졌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시장의 영향력이 커진 외환위기 이후 시대의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배순훈은 이 점을 분명히 꼬집었다. “총수일가 지분이 올라가면서 개인재산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확고해졌죠.” 그는 요즘 재벌 2·3세들이 능력 검증도 없이 경영승계를 하는 관행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재벌 2, 3세가 승계를 하려면, 창업자처럼 경영 능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유럽 등의 가족기업은 한국 재벌과 차이가 크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선진국 기업은 부친 생존 시 능력을 보여줘서 주총이나 이사회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주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아들에게 경영승계를 하는 법이 없어요.” 배순훈은 재벌의 편법 상속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경영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니까 주식을 많이 보유한 뒤 물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법은 주식이 많다고 해서 아들에게 모두 물려줄 수 없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탈법, 편법을 하는 거죠.” 배순훈은 삼성의 3세 체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주식시장에서 앞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을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권오현 부회장이 물러나지 않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게 더 좋았을지 평가할 것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까지 보여준 게 없기 때문이죠.”

배순훈은 재벌의 불투명한 경영승계 관행을 한국 기업이 실제 가치보다 주식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박정희 시대에는 후진국이 빠른 속도로 중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정부가 주도하던 금융시장에서도 (재벌의 편법승계를) 용인했어요. 하지만 세계화 시대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피하기 어려워요.” 재계가 경영권 위협을 이유로 지배구조 개선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경제민주화는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들의 경영권이 해외로 넘어가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왜곡을 정상화하자는 것입니다. 한국 주주는, 한국 정부는, 정부를 선출한 한국 국민은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봐야죠.”

이런 점에서 정부의 역할은 외려 더욱 중요해졌다는 게 외환위기 20년을 되돌아보는 배순훈의 결론이다. 김대중 정부가 경영투명성 제고, 재무구조 개선, 부당 내부거래 및 변칙 상속증여 차단 등 ‘5+3원칙’을 제시한 이래, 노무현 정부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박근혜 정부조차도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개혁의 성과에 대해 배순훈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양극화가 더 심화됐습니다. 중소·중견기업이 고용의 대부분을 담당하는데 오히려 줄었어요. 대기업은 고용은 안 하는데 계속 잘됩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이 ‘갑질’이겠죠.” 특히 그는 양극화 심화에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공급자(중소기업)는 많은데 수요자(재벌)은 한두 개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적절히 규제하지 않고, 시장원리에만 맡기면 중소기업은 죽게 돼 있어요. 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깨야 합니다.”

2003년 8월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국정과제회의에서 배순훈 동북아중심경제추진위원장이 노 대통령 옆에 앉아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3년 8월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국정과제회의에서 배순훈 동북아중심경제추진위원장이 노 대통령 옆에 앉아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정부, 혁신성장 조급증 버려야”

이야기는 자연스레 문재인 정부의 재벌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에 공감하면서도, 개혁엔 시간이 필요하고 정책의 일관성도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기업의 사유권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과거 자금 지원과 더불어 국내 시장의 독과점 체제를 인정해주던 정부가 시장경쟁체제로 전환하려면 기업들에 미리 통보를 해 시간을 줘야 해요. 그래서 기업들이 최적의 해법을 찾도록 하고 정부는 규제를 줄여 기업들의 자유경쟁을 촉진해야 합니다. 단칼에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과거 수년간 우리는 ‘온탕’과 ‘냉탕’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죠.” 배순훈은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혁신성장 정책에 대해서도 조급증을 버리라고 말했다. “5년의 대통령 임기 안에 실리콘밸리나 이스라엘 같은 벤처 단지를 형성한다는 것은 현실적이 아닙니다. 성과는 다음 정부 때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외환위기에서 문재인 정부의 혁신정책에 이르기까지 긴 이야기를 돌고 돌아 다시 대우에 다다랐다. 그에게 대우는 한국 경제의 영광과 외환위기의 상처가 응축된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끝으로 대우에 대한 냉정한 재평가를 요청했다. 그는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대우는 세계 경영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과 긍지를 줬어요. 근로자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사실이죠.” 대우가 1996년 프랑스의 톰슨멀티미디어 인수자로 선정됐을 때 ‘일본의 소니를 이긴 대우’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프랑스 여론의 반대로 결국 백지화됐지만,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특사를 보내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과거 정부가 제공하던 여신 방식이 변했는데, 김 회장은 그 변화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체에 이른 거죠.” 배순훈은 김 회장이 주창한 세계 경영에 개념적 오류는 없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의 풍운아였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1936년생으로 새해엔 82살이 된다. 최근 들어 건강이 부쩍 안 좋아졌다는 얘기가 주변에서 나돈다. “김 회장에 대해 나쁘게만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데모를 했었어요.(배순훈은 이른바 6·3세대 출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박정희가 필요했던 면도 있지 않았나요. 대우와 김 회장도 마찬가지죠. 그 덕분에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와 조선사가 만들어진 것 아닌가요. 세상에서는 김 회장이 20조원을 빼먹었다고 하는데, 지금 20조원을 주면 과거 대우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나요.”

배순훈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그만둔 뒤 현재 방산업체인 에스앤티(S&T)중공업 회장 직함을 갖고 있지만, 상시적인 일을 맡은 건 아니라고 말했다. 배순훈의 경력은 화려하다. 기업 경력으로는 대우전자 등 대우 계열사의 사장과 회장을 지냈고, 정부 쪽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정통부 장관,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중심경제추진위원장(장관급)을 역임했다. 학계에서도 국내에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서울부총장을, 미국에서는 스탠퍼드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의 객원교수를 맡았다. 재계·관계·학계를 두루 섭렵한 셈인데,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모두 장관급 공직을 맡은 것도 이채롭다. “내가 진보 세력에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웃음) 원래 ‘노사모’ 회원이었는데, 국립미술관장을 하면서 그만뒀어요.”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 게 제일 좋으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국립미술관 전 관장이었다. “남들은 직급이 가장 높은 장관이라고 하는데, 너무 짧게 했고요. 관장은 높은 자리가 아니고, 가장 최근에 했으니까 부담이 없죠.”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면서, 미술관에 대한 큰 애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009년 그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에 응모한 것은 `미술관도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배순훈이 관장이 된 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지어졌고, 연간 관람객이 4배로 늘었다. 배순훈은 관장을 그만둔 지 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나와 미술관 일을 도와주고 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녹취 심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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