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내부 통제 강화를 위한 증권사 대표이사 간담회’에 참석해 각 회사 대표들과 인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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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 대해 제기한 의혹 리스트의 일부다. 본인 해명을 통해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한국당은 막무가내로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을 거부했고,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김 위원장은 취임 이후 문재인 정부의 ‘경제개혁 아이콘’이 됐다. 업무 성과에서도 현 정부의 장관급 인사 중에서 ‘베스트’로 꼽힌다.
그로부터 1년 가까이 흐른 현재 한국당과 보수언론의 칼날은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겨누고 있다. 김 원장은 참여연대 출신의 경제개혁론자다. 19대 국회 4년간 정무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재벌 총수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 등 경제개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재벌 저격수, 금융권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부의 발목을 잡는 의원’이라며 낙선운동을 지시했을 정도다. 그는 2016년 5월말 퇴임하면서 의정활동 성과와 쟁점, 정책 제언을 꼼꼼히 담은 보고서를 냈다. 그는 400쪽이 넘는 보고서의 인사말에서 “4년 전 첫 등원을 하면서 국민 세금으로 국록을 받는 자로서 도리를 다하자고 다짐했는데, 임기를 마친 뒤 ‘세금이 아깝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위안이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 원장은 피감기관의 지원으로 외유성 해외출장을 다녀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는 출장은 공익 목적이었고, 피감기관 돈으로 출장을 간 것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지만 자리에서 물러날 사안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은 김상조 위원장 때처럼 들은 척도 않고 연일 새로운 의혹을 쏟아내고 있다. 참여연대는 “일부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다”고 비판하면서도 “기본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가짜뉴스, 이미 객관적 자료를 통해 근거없는 것으로 드러난 음해성 주장도 상당수”라고 지적한다.
“과연 김기식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의원이 얼마나 될까?” 수년간 의원 보좌관을 지낸 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아 해외출장을 가는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 오랜 관행이다. ‘김기식 죽이기’에 앞장서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2015년 두차례에 걸쳐 한국공항공사의 돈으로 미국·캐나다 출장을 다녀왔다.
한국당과 보수언론의 공세가 워낙 거세다 보니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는 듯하다. 여론조사에서 김 원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사퇴 반대보다 더 높게 나왔다. 그동한 추이를 지켜보던 진보 야당과 언론도 흔들리는 모습이다. 진보진영 안에서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진보의 생명인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김기식을 버리는 것은 보수의 프레임에 말리는 것이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의 지인들은 “나라를 위한 일인데 남 눈치 볼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과 독선으로 비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나타낸다.
보수야당과 언론이 김상조에 이어 ‘김기식 죽이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1차 의도는 금융개혁 무력화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을 전면에 내걸었다. 하지만 금융은 다른 경제 분야에 비해 개혁 성과가 더디다는 평가가 많다. 금융감독기구의 투톱 중 하나인 금융위원장은 관료 출신이고, 또 다른 축인 금감원장은 6개월 만에 중도퇴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개혁에 성공하려면 관료와 정치인으로는 어렵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구원투수’인 김기식의 낙마는 자칫 금융개혁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김 원장의 사퇴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당이 노리는 궁극의 목적은 개혁을 전면에 내건 문재인 정부의 좌초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당면 현안인 일자리 추경 예산, 헌법 개정, 남북정상회담 등을 볼모로 잡아 김기식을 낙마시킨 뒤, 여세를 몰아 현 정부를 뿌리째 흔들겠다는 속셈”이라고 분석했다. 개혁을 전면에 내건 문재인 정부와 반개혁 세력 간의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곽정수 경제에디터석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