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삼성에스디아이(SDI) 등 삼성그룹 전자계열사 공장의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이하 작업환경보고서) 공개를 둘러싼 최근의 갈등은 다른 기업과 달리 유독 작업환경보고서를 온전한 형태로 공개하지 않는 삼성만의 ‘이상한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확인됐다.
23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삼성전자 온양 반도체 공장을 비롯해 삼성그룹 전자계열사들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작성·공개해야 하는 작업환경보고서에 담긴 내용 중 일부를 가린 ‘부분 보고서’만을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국내 다른 사업장과 달리)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전자계열사들이 풀버전 작업환경보고서를 소속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제공하지 않아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반도체 등 다수 작업장은 작업환경보고서 풀버전을 해당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반면, 삼성전자는 화학물질 사용(량)이나 공정 이름 등 이른바 ‘핵심기술·정보’라고 주장하는 일부 내용은 블라인드 처리 하고 유해인자 노출 관련 정보만 기록된 ‘부분 제공’ 보고서를 노동자들에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산업재해를 다투는 싸움에서 스스로 산재를 입증해야 하는 반도체 공장 피해자·유족들은 ‘더 많은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삼성전자를 상대로 풀버전 작업환경보고서를 제공하라고 줄곧 요구해왔다. 엄밀히 볼 때 이번 ‘삼성 대 고용부’ 갈등의 쟁점은 보고서 공개 자체보다는 ‘풀버전 보고서 제공’에 있는 셈이다.
작업환경보고서는 각종 인체 유해 인자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근거자료로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다. 고용부가 정한 양식(총 190개 유해인자 목록별 구분)에 따라 정기적으로 조사·측정해 보고서를 작성한 뒤 지방고용노동관서에 제출해야 한다. 흔히 사업장 내 출입보안구역에 따로 비치해두는데, 회사는 설명회 등을 열어 보고서 내용을 개별 노동자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일정한 양식에 따르고 있으나 보고서에 담는 내용은 업종이나 회사별로 조금씩 다르다. 보고서 부분 공개 관행에 대해 삼성 쪽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정보공개법)상 공개 예외로 인정되는 ‘영업비밀’ 및 ‘국가핵심기술’에 속하는 내용을 블라인드 처리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에 작업환경보고서 풀버전을 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고용부 관계자는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노동자에게 알리도록 한 법 취지를 고려할 때 풀버전을 제공하는 게 맞다는 쪽으로 우리는 해석한다”고 말했다. 삼성이 영업비밀을 앞세워 일부 정보를 가린 채 보여주고 있으나, 사실은 피해 노동자들이 산재 입증에 쓸 수 있는 내용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보고서 공개 파동에 대해 일각에서 “영업비밀이나 국가핵심기술 대목은 뺀 채 공개하면 될 것 아니냐”고 절충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삼성 쪽이 그동안 풀버전 보고서를 산재 피해 노동자들에게 제공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타협안이 되기 어렵다. 게다가 산재 피해자 쪽은 삼성이 부분 보고서에서 감춰온 화학물질 이름과 사용량 등 작업장 환경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제공받아야 산재 입증이 가능하다며 풀버전을 요구하고 있다.
고용부의 전체 보고서 공개 결정은,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공장에서 일하다가 작업장 유해물질로 산업재해를 당한 피해자 본인과 유족들이 산재 입증을 위해 필요하다며 정보공개법에 근거해 풀버전 공개를 신청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고용부는 지난 2월18일부터 3월20일까지 차례로 삼성전자 온양·기흥·화성·평택공장(반도체) 및 구미공장(휴대폰), 삼성디스플레이 탕정공장(엘시디·LCD), 삼성에스디아이 천안공장(배터리) 등 7개 공장의 작업환경보고서 풀버전을 피해자 쪽에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정보공개법은 공개 유예기간(30일)을 두고 있다.
이에 맞서 삼성 전자계열사들은 “풀버전이 외부에 공개되면 핵심기술, 공정 노하우 등 ‘영업비밀’이 중국 등 경쟁 기업에 유출될 우려가 있다”고 반발하며, 유예기간 중에 행정소송 및 정보공개 집행정지(수원·대전지법 등 법원), 행정심판 및 정보공개 집행정지(중앙행정심판위원회), 산업기술보호법에 근거한 국가핵심기술 판정(산업통상자원부) 신청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대응에 나섰다. 이어 지난 17~19일 중앙행정심판위와 수원지법은 삼성의 ‘공개 집행정지’(민사소송에서의 본안 판단 이전의 가처분 성격)를 받아들였고, 산업부도 풀버전에 담긴 여러 내용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판정하며 일단 삼성 쪽의 손을 들어준 상태다.
이번 사태의 전개 구도를 보면, 당사자인 삼성전자는 각종 소송·신청을 통해 민첩하게 ‘행동’에 나서고 있을 뿐 사실은 한발 뒤에 물러서 있는 형국이고, 반면에 노동자의 이해를 주로 대변하는 고용부와 민간기업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산업부가 싸움의 전면에 나서 서로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용부 쪽은 “중앙행정심판위와 법원의 본안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보겠다”고 밝혔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Weconomy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 Weconomy 페이스북 바로가기: https://www.facebook.com/econoh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