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18일 오후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대한항공 직원들이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을 규탄하고 경영 퇴진을 촉구하는 3차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진그룹 조양호 일가가 바짝 엎드렸다. 2019년 대한항공 창사 반세기를 앞두고 그야말로 사상 최대 위기를 맞았다. 재벌 총수 일가가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범죄와 파렴치한 행태가 다 드러났다. 직원 ‘반란’부터 검경·공정위·관세청 등 당국의 총출동까지 조양호 일가를 향한 파상공세도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조양호 일가가 형사처벌을 피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정도 상황이면 경영권을 내놓고 물러나는 게 상식이지만 조양호 일가는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이들이 한진그룹 경영진에서 퇴출돼 한국 재벌사에 새 이정표를 마련할지 국민의 관심이 쏠린다.
2018년 5월16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가 다시 관세청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이 처음 보도된 4월12일 이후 여섯 번째 압수수색이다. 관세청만 네 차례, 경찰과 법무부 출입국 당국이 한 차례씩 건물을 탈탈 털고 혐의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챙겨갔다. ‘늘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는 한국 재벌에 대한 수사는 전혀 새롭지 않다. 하지만 한 달 남짓 기간에 이렇게 많은 기관의 수색을 받은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조 전무가 던진 물컵의 파장은 ‘물컵 속 태풍’에 그치지 않고 조양호 일가 퇴출을 몰고 올 거대한 회오리로 번져나가고 있다.
범법·비리·갑질 백화점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조양호 일가의 행태는 ‘재벌 비리의 완결판’이라고 할 만하다. 가장 최근에 드러난 혐의는 재산 국외 도피다. 밀수가 아닌 국부 유출을 조사하는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이 5월16일 압수수색에 나선 배경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력한 단죄 의지를 표명한 터여서 고강도 수사와 엄중한 처벌이 예상된다. 문 대통령은 5월14일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려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을 대표적인 반사회적 행위로 규정하고, 관련 기관 합동조사단 설치를 지시했다. 재산 국외 도피는 형량도 무겁다. 도피 재산이 50억원을 넘으면 무기 또는 징역 10년 이상, 50억원 미만이더라도 5년 이상 징역형을 받는다.
조양호 일가는 그동안 문제가 돼온 국외 상속재산에 대한 세금도 5월15일에야 납부하기 시작했다. 국세청은 2017년 세무조사 과정에서 2002년 사망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보유하던 스위스·프랑스 등 유럽 지역 부동산과 예금을 조 회장이 상속받으면서 500억원가량의 상속세를 내지 않은 혐의를 포착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한진그룹에선 고의 탈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진그룹은 조양호 일가가 상속세와 가산세를 포함해 모두 852억원을 5년간 분할 납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뒤늦게 상속세 수정신고를 하고 세금을 낸다고 조세포탈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형 기준을 보면, 탈루세액이 200억원을 넘으면 감경해도 4~7년, 가중 처벌되면 8~12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조양호 일가의 밀수 정황도 광범위하게 감지된다. 명품, 고가 가구 등 외국 물품의 밀반입에 대한 대한항공 직원들의 구체적인 제보는 끊이지 않았다. 관세청은 밀수품을 찾기 위해 벌써 세 차례 압수수색에 나섰으나 물증을 확보했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밀수가 확인되면 역시 중형이 불가피하다. 밀수품 금액이 2억원 이상~5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 5억원이 넘으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형이 가능하다.
이런 중대 범죄 말고도 조양호 일가의 범법과 비리 혐의는 다채롭다. 회사 경영과 관련된 것으로는 조양호 일가의 불법적 권한 행사를 들 수 있다. 조양호 회장과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공식 직책도 갖지 않은 채 자회사인 진에어의 주요 의사결정에서 결재권을 행사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국적을 보유한 조현민(미국명 조 에밀리 리) 전무가 6년 동안 등기임원으로 불법 재직한 문제를 국토교통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확인됐다.
회사의 공식 경영조직과 무관한 조양호 부자의 비정상적 행위는 2018년 3월까지 계속됐다. 직책도 없이 경영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한 것은 조양호 일가가 그룹 계열사들을 사유물 정도로 여긴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들의 결재권 행사로 진에어가 손실을 입었다면 상법상 배임죄에 해당한다. 이 밖에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혐의는 처벌을 받더라도 3년 이하 징역형이어서 처벌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조양호 회장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가운데선 운전기사에게 한 폭행과 폭언의 죄질이 가장 나쁘다. 이 이사장에게 시달리다 못해 그만둔 운전기사들이 침이나 신발 세례를 받았다고 털어놓는 등 구체적 증언을 하고 있다. 호텔 공사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도 공개된 터여서 이 이사장의 형사처벌 가능성은 매우 높다. 운행 중인 운전자를 폭행했을 땐 2~4년 징역형의 가중처벌을 받을 수 있다.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 박람회 CES가 개막한 2018년 1월9일 오전(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왼쪽)이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오른쪽), 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운데)와 함께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조양호 퇴출’ 삼각편대
“조양호 아웃!”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계속돼온 대한항공 직원의 촛불집회에서 울려퍼진 목소리다. 조양호 일가의 경영권 박탈 필요성은 대한항공 직원은 물론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폭넓게 형성된 공감대다. 국적항공사처럼 공공성이 큰 기업을 이처럼 범법을 일삼고 파렴치한 총수 일가 손에 더 이상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양호 일가가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조양호 일가는 이전에도 대형 항공사고나 뇌물수수 등으로 여러 차례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요구받았으나 경영권을 놓지 않았다. 이번에도 조양호 회장은 물의를 빚은 두 딸을 일단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은 작은 자회사인 진에어의 대표이사를 그만둔 게 고작이다. 이런 ‘겉치레 자숙’은 ‘땅콩 회항’ 사건을 비롯해 중대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되풀이돼왔다. 정치권력이나 감독 당국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조양호 일가의 생존법이다. 국토교통부와 관세청이 갖가지 비리가 터진 뒤에야 묵은 징계를 하거나 압수수색한다며 법석을 피워 ‘칼피아’라는 비난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에는 조양호 일가의 버티기가 쉽사리 통하지 않을 전망이다. 먼저, 머슴이나 노예 취급을 받으며 울분을 삼켜온 대한항공 직원들 결의와 저항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조양호 일가를 지금 같은 궁지로 몰 수 있었던 것도 익명 단톡방에 쏟아진 직원들 제보 덕분이다. 직원들은 자신들 뜻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에 의존하지 않고 새롭게 직원연대를 꾸려 저항을 더욱 조직화, 체계화하며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직원들의 지속적인 제보와 촛불집회는 이번 사태가 국민 관심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조양호 일가 퇴출 여론을 불러모으는 기본 동력이다.
다음은 정부 당국의 강력한 처벌 의지다. 현재 드러난 비리나 수사 상황에 비춰 조양호 일가가 형사처벌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도 높다. 조양호 회장이나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실형을 받으면 형 집행 기간에는 경영 일선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뇌물죄 등으로 감방 신세를 진 다른 재벌 총수들처럼 조양호 일가도 그룹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 애쓰겠지만 녹록지는 않다.
조양호 일가의 그룹 지배구조는 그리 탄탄한 편이 아니다. 시가총액 3조2천억원 정도인 대한항공 주식 가운데 약 33%가 조양호 일가의 우호지분이다. 전체 주식의 56%를 가진 7만여 소액주주와 12% 남짓을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이 나선다면 총수 일가 퇴진을 압박할 수 있다. 소액주주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제이앤파트너스 법률사무소는 소액주주 위임을 받아 주식 가치를 훼손한 총수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소액주주 주식을 모으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국민 여론과 당국의 강력한 압박이 뒷받침된다면 주총에서 전문경영인으로 교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국민적 분노, 사법적 단죄, 주주의 반대, 직원의 저항에도 조양호 일가가 버티는 상황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재벌그룹처럼 사회적 비중이 큰 기업의 경영진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제도적 제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상법은 사외이사를 뺀 일반 기업의 임원 자격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재벌 총수들이 감방을 몇 차례 들락거리고도 곧바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있는 이유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경제학)는 금융회사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 같은 제도적 장치로 재벌그룹 경영진의 자격 제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재벌그룹은 국가적 자원 집중으로 육성됐고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 금융회사 못지않은 사회적 책임이 요구된다”며 “경영권 세습 등 봉건영주 행태를 보이는 재벌 총수 일가의 손에 기업을 그냥 맡겨두는 것은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일정 자산 이상 기업에 경영과 관련된 중대 범죄를 저지른 사람 등으로 한정해 경영에서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금융위원회는 금융회사 대주주 적격성 검사 대상을 최대주주에서 실질적 영향을 끼치는 대주주로 확대하고 최고경영자도 심사를 받도록 할 예정이다.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이 대표 발의한 ‘항공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도 같은 맥락이다. 법안은 항공안전법·항공보안법 등 항공사 업무와 직접 관련된 법을 위반한 사람이 항공사 임원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제재 규정을 강화했다. 임원 결격 사유를 ‘금고 이상 실형’에서 ‘벌금 이상’으로 확대하고, 금지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며, 제재 대상에 미등기임원도 포함했다. 채 의원은 불법 정도가 심할 땐 임원 자격을 아예 박탈하는 법안도 검토 중이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