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용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가운데)을 비롯한 입주기업 대표들이 4월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협회 사무실에서 월례회의를 열고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에 따라 개성공단이 재가동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이들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연합뉴스
“공단이 폐쇄되고 보니 오히려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신한용(58)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은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가장 바쁜 기업인이 됐다. 잇따르는 공단 입주 문의에 밀려드는 언론 인터뷰들. 아직도 이런 변화가 실감나지 않을 때가 있다. 북-미 정상회담 날짜·장소 발표 지연, 남북 고위급회담의 갑작스러운 연기 등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애가 타 입안이 바싹 마르기도 한다. 공단이 문 닫은 지난 2년 남짓의 상실감만큼이나 공단 재가동을 향한 열망이 크다. 2016년 2월 공단을 문 닫게 한 박근혜 정부가 촛불 민심으로 퇴출된 뒤에도 한동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북한의 거침없는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높아만 갔다. 남북 화해협력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는 ‘북한 퍼주기’라는 부정적 여론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이젠 기대를 접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 2017년에는 정부로부터 공단 폐쇄 보상금을 받아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2018 평창겨울올림픽 북한 참가에 이어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된 뒤에도 신한용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의 조바심은 컸다. 애초 정상회담 의제에 남북 경제협력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문점 공동선언에서 남북경협의 전면 재개 방침이 천명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선회가 시급한 경제개발 필요성 때문이고 문 대통령이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안'을 김 위원장에게 전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다. 신 회장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다면 입주기업들이 개성공단을 그저 돈벌이 되는 공장 정도로 여겼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남쪽 기업과 북쪽 노동자의 상생이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에 절감했다는 것이다.
개성 갈 날만 손꼽는 입주기업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최근 태스크포스를 만들고 공단 재가동 준비에 한창이다. 쫓기듯 개성을 떠나야 했던 입주기업의 96%는 재입주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른 기업들 문의도 잇따른다. 개성공단 인지도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이다.
어망 등 어업도구 생산업체인 신한물산을 경영하는 신 회장은 북한 노동자에게 지급한 초코파이를 비롯해 임금, 소모품비 등 실제 들어간 돈을 계산하면 인당 인건비가 월 230달러(약 25만원) 정도 됐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등에선 임금 외 추가 비용이 들지 않기에 인건비 총액만 따지면 개성이 별로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더 중요한 개성공단의 장점으로 △북한 노동자의 높은 노동생산성과 노동 규율 △시간과 물류비에서 탁월한 입지 조건 △앞으로 커질 북한 내수시장 선점 효과 △수월한 의사소통 등을 꼽았다. 실제 개성공단 폐쇄 뒤 입주기업들은 대체 부지를 찾느라 많이 애먹었다. 동남아 등지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검토했으나 개성공단만 한 곳이 없었다고 신 회장은 말했다.
공단 재가동을 앞두고 신 회장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입주기업들에 대한 일부의 거부감이다. ‘북한 퍼주기’라는 이념 공세 말고도, 인건비 절감을 위한 단순 임가공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국내 일자리를 줄인다는 부정적 인식이 만만치 않다. 신 회장은 개성공단 가동으로 남쪽 5천여 협력업체에서 신규 고용 8만여 명이 생긴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북한에 개성 같은 공단이 더 늘어나면 남쪽 중소기업의 고용 창출 효과가 오히려 커질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삼성전자처럼 대기업은 국내 협력업체를 데리고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외국에 나간 중소기업은 현지 업체에서 필요 물품과 서비스를 조달받아야 한다. 부가가치 대부분이 현지에 남는 것이다. 반면 개성에서 공장을 가동하면 국내 협력업체와 손잡지 않을 수 없다. 신 회장은 “개성공단이야말로 한국 중소기업들 산실이 돼야 한다”며 “국외로 나간 기업이 개성공단으로 돌아오면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단 재가동을 위해 당장 필요한 일은 현지를 방문해 시설물을 점검하는 것이다. 장비는 유출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손봐야 하는지, 공장 재가동 비용은 얼마나 들지 등을 가늠해봐야 한다. 협회는 다급하지만 방북 신청을 일단 북-미 정상회담 이후로 미뤘다. 공단 재가동은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다름없고, 남북연락사무소도 개성에 두기로 한 터여서 자신들 사정만 먼저 봐달라고 보채는 것으로 비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남북 정상회담 전에는 공단 재가동의 절실함을 알리기 위해 방북 신청으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기다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공장을 새로 돌리려면 자금 마련도 시급하다. 공단 폐쇄로 입은 손실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계제가 아니다. 외국으로 공장을 옮긴 기업은 투자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 또 전기, 용수, 하수, 가스 등 기반시설 정비에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신 회장은 “2013년 공단 가동이 6개월 동안 중단됐을 때도 재가동에 1개월 이상 걸렸다”며 “현지 상황과 업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재가동에 2~6개월이 걸릴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공장 재가동이 절박해 시간이 많이 단축될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운명 같은 개성 진출
2017년 7월 협회 회장을 맡은 신 회장은 북한 진출을 운명처럼 느낀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 서해공동어로수역이 포함된 것을 보고는 곧바로 개성공단 입주를 결정했다. 어업 관련 업체는 이 회사가 유일하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오가는 바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그의 가슴속에 솟구쳤다. 한-중 수교 직후인 1993년 무작정 중국으로 진출한 특유의 도전정신과 돌파력이 이번에는 북한으로 그를 이끌었다. 어업이 낙후된 북한 어민들이 자신 회사에서 만든 그물로 고기 잡는 꿈을 꾸는 신 회장은 공단이 재가동되면 개성을 중심으로 회사 체계를 재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개성공단 운영을 비롯해 남북경협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불확실성 해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신 회장은 강조했다. 영세기업이 모든 걸 걸고 공장을 지었는데 대통령 말 한마디로 공단이 문 닫아버리는 불행한 사태가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일방적 조처를 할 수 없도록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의 국회 비준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남북 당국 사이에 구속력이 강한 합의서 같은 것을 별도로 체결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다.
신 회장은 개성공단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에 대한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국내 영세공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행·폭언, 갑질 행태를 크게 우려했다. 외국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자존심이 강한 북한 노동자를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폭행과 갑질 피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느끼는 적대감을 북한 노동자들이 갖는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개성공단은 남북 사이 보통 사람들의 접촉이 가장 잦은 곳이다. 북한 노동자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남한 기업 관계자들 모습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바라보기 쉽다. 개성공단이 발전하고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촉매가 되기 위해선 입주기업 관계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신 회장은 강조했다.
박중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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