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서 오랜 기간 사업비를 몰래 빼돌려 인건비로 유용하고 비자금을 조성해온 의혹이 불거지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이번 일을 김영배 전 부회장이 2004년부터 14년간 장기 군림하며 경총을 ‘사조직화’한 것과 연관짓는 시각이 많다. 경총 부회장의 임기는 2년인데, 김 전 부회장은 무려 일곱차례나 연임했다. 경총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재계 인사는 “권력이 장기 집권하면 부패하듯, 김 전 부회장이 너무 오랫동안 경총 내부 살림을 좌지우지하다 보니 전횡과 부정부패가 발생한 것으로, 그동안 소문이 무성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라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은 재임 시절 경제조사·고용정책 등 사무국의 요직을 자신의 모교인 중앙대 출신으로 채웠다. 돈을 관리하는 재경파트는 수년 전 부회장 직속으로 바꾸고, 수십년간 재경업무만 맡았던 측근을 담당 임원에 앉혔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김영배 왕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일 오후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 앞에 경비 관계자가 근무를 서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경총 내부에서는 현금으로 지급되는 격려금이 ‘수상한 돈’이라는 것을 눈치챈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한 퇴직 간부는 “직원들도 연봉과 격려금 총액이 사업계획상의 정식 인건비보다 훨씬 큰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격려금이 현금으로 지급된 것을 두고도 불법을 숨기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많다. 한 직원은 “정식 급여는 통장 이체 방식인데 격려금만 현금으로 지급됐다”며 “김영배 전 부회장이 ‘집에서 모르는 비상금이 필요하지 않으냐’며 현금 지급을 지시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의 사무실에는 비자금을 보관하기 위한 대형 금고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한 현직 직원은 “김 전 부회장 방에 높이가 어른 가슴까지 오는 회색의 대형 철제 금고가 있었는데, 4월 초 송영중 부회장이 취임하기 직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경총은 김 전 부회장 퇴임 직후 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전격 지급했다. 직원들 사이에선 금고 속에 있던 현금을 급히 정리한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경총이 송영중 상임부회장 취임 직전 대규모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문서 파기 작업을 벌인 것을 두고도 불법행위 관련 증거인멸 목적이었다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 현직 직원은 “김 전 부회장이 쓰던 컴퓨터, 재경팀과 담당 임원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외부 전문가에게 맡겨 복구가 안 되게 하는 방식으로 지웠고, 문서 파기도 대량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은 노사 문제에서 사용자 입장을 가장 강경하게 대변하는 ‘매파’로 불렸다. 사용자들의 입장을 적극 대변했지만, 경제계 안에서도 불만이 적지 않았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경총은 전체 회원사를 위해 일해야 하는데, 김 전 부회장은 특정 그룹에 유착돼 다른 회원사의 의견은 무시하고 사무국 중심으로 운영했다”고 비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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