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FTA 개정 1차 협상 장면. 산업통상장원부 제공
지난 11일 스위스계 해외투자자본인 쉰들러홀딩아게(AG)가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를 정부가 불법승인해주는 바람에 최소 2억64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투자자-국가분쟁해결(ISDS) 중재의향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삼성물산 합병 관련 2건과 재미교포의 서울 마포구 택지 강제수용 등 우리 정부가 ISDS 분쟁에 휘말린 사건은 올들어 4건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국제사회에서 ISDS를 폐기·개혁하자는 정치적 흐름이 일면서 ISDS의 지위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앞장서 ISDS를 전파해온 미국이 오히려 ISDS 폐기 흐름을 주도하는 등 바야흐로 ’ISDS 국제 무역투자체제’에 극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 25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등의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ISDS 제도 개선 국제세미나’에서 ‘글로벌통상감시를 위한 퍼블릭시티즌’의 멜린다 루이스 국장은 “미국이, 1990년대 초에 ISDS를 최초 도입했던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에서 스스로 ISDS 조항 삭제를 추진하는 등 ISDS 폐지·개혁이라는 놀라운 현실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의회·사법기관·변호사단체·주정부연합 등을 중심으로 보수·진보를 막론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ISDS 반대론이 부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USTR) 대표조차 공개적으로 “ISDS는 국가 사법주권을 침해하고 미국 일자리를 해외로 유출시킨다”고 비판한 바 있다. 미 무역대표부가 상무부·공화당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혀 예기치 않게 ‘ISDS 탈퇴’를 꺼낸 배경에는 해외로 나가 있는 자국 자본의 국내 회귀를 노린 것도 있지만 새 무역협정에 ISDS가 포함되면 이제 미 의회에서 비준을 얻어내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루이스 국장에 따르면, 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인도네시아도 ISDS 조항이 들어간 기존 투자협정에서 이탈하거나 자국의 공공정책 집행을 보장하는 쪽으로 ISDS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ISDS로부터 등을 돌리는 정치적 조류는 유럽연합에서도 형성되고 있다. 라일라 휴스 국제환경법센터 선임변호사는 “유럽연합도 ISDS의 정당성을 재검토하고 있고, 대안으로 다자투자법원(MIC)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며 “다만 다자투자법원은 ISDS의 근본 문제는 손대지 않은 채 몇 가지 절차를 고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국제 투자자본 보호라는 골격은 유지하는 선에서 부분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전세계 대다수 무역투자협정에 포함된 ISDS가 격동기를 맞으면서 유엔 상거래법위원회(UNCITRAL·회원국 60개)도 특별 워킹그룹을 구성해 ISDS 개혁을 위한 공식 논의에 들어갔다. 지난 4월 뉴욕에서 열렸던 워킹그룹 실무회의는 오는 9월 한국에서 다시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ISDS 지위에 이상신호가 켜지자 국제 투자자본마다 ‘ISDS 막차’에 올라타려 하면서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 ISDS 청구가 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해외 투자자본에 특권을 부여하고 국민들이 낸 막대한 세금을 정부 배상금으로 지불하게 하는 ISDS는, 절차적으로도 국제중재기관(ICSID)에 임시 선임되는 세 명의 민간 중재재판관들이 더 많은 돈벌이를 위해 국제 투자자본을 위한 편향적 판정을 내린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돼 왔다. 애초에 ISDS가 내세운 ‘투자 증진’이란 경제적 효과도 의문시된다. 퍼블릭 시티즌의 최근 조사연구에 따르면, 각국에서 양자 투자협정에 도입된 ISDS 조항이 해외직접투자(FDI) 유치를 증가시킨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ISDS의 편익은 희박한 반면, 당사국 정부가 국제중재에 회부될까 두려워 정당한 공공정책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공공정책 위축’ 같은 비용은 명백하고 실질적이라는 얘기다.
한국은 양자 투자보장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 총 80여개 협정에 ISDS 조항을 두고 있다. ‘ISDS 무력화’가 국제 동향으로 대두하고 있지만 한·미 양국은 한-미자유무역협정 개정협상에서 ISDS 남용을 규제하는 쪽으로 일부 개정에 합의했다. 우리 쪽의 ISDS 개정 요구에 미국 협상팀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에게 ISDS는 지켜내고자하는 ‘관심사항’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남희섭 변리사는 “ISDS가 국제적으로 격동하는 와중에 법무부·외교부·산업부는 명확한 우리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며 “ISDS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미국 스스로도 ISDS를 고수할 생각이 없는 유리한 지형인데도, 우리 협상팀이 이 기회에 왜 ISDS 폐지를 밀어붙여 관철시키지 못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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