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시 롯데마트 푸미홍점에 있는 한국식품 매장을 찾은 현지인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박중언 기자
7월2일 하노이 시내 중심가 한국문화원에서는 젊은 베트남 여성 다섯이 한국 걸그룹 노래에 맞춰 손동작 안무를 배우느라 한창이었다. 한류 문화 확산을 위해 한국에서 강사를 파견해 현지 젊은이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 ‘케이팝 아카데미’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응우옌티투는 “대학 시절 소녀시대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한국 음악이 내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이후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이젠 한국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경영을 전공한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을 더 배우기 위해 유학을 준비 중이다.
‘케이푸드’의 힘
음악과 드라마만이 아니다. 다양한 한국 문화와 상품이 베트남인들 삶에 녹아들고 있다. 기후와 생활환경 때문에 입맛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 한국 식품 선호도가 높다. 베트남의 마트에선 현지 업체에서 만든 김치도 많이 보였고, 편의점에서도 김치를 팔고 있었다.
최근 조사에서 베트남 국민의 김치 인지도는 98%, 먹어본 비율이 75%, 구매한 비율이 60%인 것으로 나타났다. 떡볶이·만두·김이 잘 팔리며, 잡채와 불고기의 인기도 높다. 박승찬 씨제이(CJ)푸드 베트남법인장은 “다른 동남아 나라들보다 향신료를 적게 쓰는 등 한국과 입맛 차이가 작고 자극적인 케이푸드가 확실히 인기”라며 “베트남인들의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CJ는 2017년부터 꺼우쩨 등 현지 식품회사 세 곳을 인수해, 2017년 17% 성장률을 보인 가공식품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700억원을 들여 연구·개발 기능까지 갖춘 식품종합생산기지를 만들고, 냉동·육가공·수산가공·김치·김의 다섯 가지 전략 제품군에 집중할 계획이다. 오뚜기, 팔도 등 다른 한국 식품회사들도 베트남을 동남아 생산·판매 전진기지로 삼는다는 전략에 따라 공장 신·증설에 나섰다. 베트남에 열대과일이 풍부하지만 거기서 나지 않는 배·포도·딸기 등의 수출이 크게 늘고 있다.
외식 프랜차이즈로는 뚜레쥬르와 롯데리아가 선전하고 있다. 베트남에 ‘그날 구워 파는 빵’의 개념을 선보인 뚜레쥬르는 36개 매장을 내어 프리미엄 베이커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소득 상위 10% 이내, 20~30대가 주 고객이다. 빵과 커피·음료를 함께 파는 카페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7월5일 호찌민 시내 뚜레쥬르 1호점을 찾은 여성 고객은 “빵값이 비싸지만, 품질에 비춰보면 적절한 편”이라고 말했다.
이날 푸미홍 고급주택가 롯데마트 안에 있는 롯데리아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현지인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KFC 등과 함께 대표적인 패밀리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롯데리아에선 햄버거가 아니라 치킨이 주메뉴다. 닭을 워낙 좋아하는 베트남인들 입맛을 잡기 위해 철저히 현지화 전략을 편 결과다. KFC보다 훨씬 많은 230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유통 분야에선 롯데마트 진출이 활발하다. 현재 13개 점포를 열었고, 쇼핑과 문화생활이 동시에 가능한 복합문화시설로 운영한다. 베트남인 실생활과 관련된 규제가 강해 유통은 사실상 2018년부터 빗장이 풀리고 있다. 홈쇼핑에서 한국 기업 활약도 두드러진다. CJ오쇼핑이 2011년 베트남 1위 케이블TV 사업자 SCTV와 합작해 설립한 SCJ TV쇼핑은 시장점유율 60%를 기록하고, 한국 상품의 판매 비중이 25%에 이른다고 CJ 쪽은 밝혔다.
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호치민시 고급 주택가 푸미홍 지역에 들어선 롯데마트. 박중언 기자
일본과 한판 대결
베트남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한류 드라마와 음악은 한국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적잖이 기여한다. 한류 스타들의 꾸밈새, 옷차림 등을 따라 하는 수요가 크다. 베트남 시장조사업체 Q&Me의 조사 결과, 화장품(46%)·패션(41%)·음악(30%)·영화(16%)에서 한국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로 꼽혔다. 의류에선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고, 음식은 일본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전 분야에선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업계 자료를 보면,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일본 소니의 시장점유율은 35~40%다. 삼성전자도 비슷한 수준이며, LG전자가 12~1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디어마트에 따르면, 한국 제품은 텔레비전 매출의 60%, 에어컨·냉장고·세탁기의 40%, 스마트폰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미디어마트 레꽝부 사장은 “업체 간 기술 차이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며 “한국 기업들은 한류 덕을 보기도 하지만, 제품 업그레이드로 신규 소비를 자극하는 마케팅 기법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소니는 품질이 좋다는 전통적 이미지로 시장지배력을 유지한다. 중국 제품은 기술과 브랜드 이미지 면에서 아직은 경쟁력이 낮다. 중국의 베트남 지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중국 제품 확산의 최대 장애물이다.
고가 소비재인 자동차 시장에선 한국의 추격세가 뚜렷하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자동차 국산화에 힘을 쏟으면서 향후 판도를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2017년 기준 시장점유율은 일본 48%, 한국 30% 수준이다. 호찌민시 현대자동차 매장의 판매 직원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고 디자인과 옵션이 다양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좁은 도로 사정과 차량 공유 문화의 급속한 확산도 소형차 중심의 한국 브랜드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한 현지인은 “그랩(동남아에서 우버를 밀어낸 공유차 업체) 차량을 부르면 열에 아홉은 모닝이나 i10이 온다”고 말했다.
일본 차의 위세에 눌려 줄곧 망설이던 현대차는 2017년 현지 자동차 제조사 탄꽁과 지분 50 대 50의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지속 성장이 예상되는 베트남과 함께 판매량이 연간 300만 대를 넘는 동남아를 겨냥한 조처다. 기아자동차도 베트남 최대 자동차 제조업체 타코와 손잡고 모닝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특별한 한국
베트남 현지에선 한국에 대한 호감이나 친밀도를 쉽게 느낄 수 있다. 한류 문화에 반한 젊은이만이 아니다. 한국인에게도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 나라보다 한결 친숙하게 다가온다. 기질적 측면의 공통점이 우선 거론된다. 베트남어에도 ‘정감’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오랜 기간 원조를 해온 일본이나 유럽 나라 국민보다 한국 사람이 훨씬 정답다고 베트남인들은 말한다.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는 효를 비롯한 유교문화와 한자 어원도 공통적 요소에 포함된다. 한국 유학을 준비 중인 응우옌티투는 “문화가 비슷해 이해가 쉽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중국·프랑스 등 외세 지배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민족적 자존심이 한국만큼 강하고, 분단과 내전이라는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의 쓰린 기억은 한국의 베트남 발전 기여로 상당히 상쇄했고, 한국의 발전상에 대한 부러움이 우호적 감정을 배가한다. 10년 넘게 현지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 주재원이 “한국 제품은 베트남에서 30%를 기본으로 먹고 들어간다”며 “한국 기업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적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박중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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