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일 오후 마닐라베이에서 연인끼리 앉아 얘기를 나누거나, 가족들은 집에서 싸고 온 도시락을 꺼내 먹으며 대화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7월3일 오후 마닐라베이.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 항구도시에는 로하스 블러바드를 따라 2km 남짓한 산책길 베이워크가 있다. 이 거리를 따라 남국 정취를 자아내는 야자나무와 분위기 있는 가로등이 늘어서 있다. 해질녘이면 멋진 일몰 풍경을 보여주는 이 길을 따라 많은 시민이 산책하고 있었다. 검은 바다를 보며 도시락을 꺼내 먹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가족과 함께 이곳에 온 로드릭 피눌란(42)은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해 묻자 엄지를 치켜세웠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된 뒤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 필리핀은 교통, 전기, 주택 같은 인프라가 부족한데, 그 부족한 인프라를 확장하려고 한다. 미국 뉴딜정책처럼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치안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높은 빌딩이 많이 들어서 있어 필리핀의 강남으로 불리는 마카티. 7월4일 이곳에 있는 쇼핑몰 ‘그린벨트’에는 명품 매장과 고급 레스토랑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알프레도 베티줄라(32)는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드러냈다. “두테르테가 외국자본을 불러들여 민영화를 하면서 국가 재산을 매각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신을 모독하고 있다.”
6월 가죽점퍼를 입고 한국을 방문해 눈길을 끌었던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한 마닐라 시민들의 생각은 이렇게 엇갈렸다. 실제로 필리핀 여론조사 기관들이 조사하는 두테르테 지지율은 50% 안팎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2016년 6월 대통령이 된 뒤 취임 초기에 90% 이르던 지지율은 절반가량 내려갔다.
지표로만 보면, 필리핀은 견고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2017년 필리핀 경제성장률은 6.7%였다. 아세안 국가 가운데 베트남(6.8%)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자료를 보면, 필리핀은 2018년에도 6.8%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세계은행과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필리핀 남부가 무슬림과의 전투, 마약과의 전쟁 등 정치적으로 불안하지만, 경제성장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아세안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2018년 4월29일 싱가포르에 사는 필리핀인 모임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필리핀 성장의 견인차 ’두테르테노믹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두테르테노믹스’(Dutertenomics)가 자리잡고 있다. 바로 두테르테 대통령 임기 동안 인프라 개발을 주요 동력으로 삼아 필리핀 부흥을 도모하는 경제정책이다. 핵심은 낙후된 인프라 개발, 규제 완화를 통한 외자유치, 지방개발을 위한 불균형 완화 등으로 모인다.
구체적인 방법은 ‘빌드, 빌드, 빌드’(BUILD, BUILD, BUILD) 프로그램이다. 두테르테 대통령 임기 6년 동안 도로, 교량, 공항, 항만, 수자원, 에너지, 통신, 하수도, 폐기물관리 등 여러 분야에서 인프라를 건설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젝트는 4895개에 이른다.
문제는 자금이다. 이와 관련해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7년 5월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 주도의 ‘신실크로드 전략’으로 내륙과 해상의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말함) 포럼에서 “1800억달러(약 185조원)를 인프라 개선에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핀 1년 예산이 750억 달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다른 나라에서 주요 재원을 조달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힌 셈이다.
인프라 투자의 상당 부분은 민관합작투자사업(Public Private Partnership, PPP)으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PPP는 주로 개도국 정부나 공기업이 예산 부족으로 사업 진행이 힘든 프로젝트에 민간기업 참여를 유도해 인프라 등을 건설하고 운영 수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디오크노 필리핀 예산장관은 인프라 프로젝트 확대로 앞으로 ‘인프라 황금기’가 도래할 것으로 평가했다.
7월5일 마닐라 마카티에서 만난 안젤리카 케이아스(Angelica Cayas) 필리핀투자청 국장은 “두테르테노믹스는 필리핀의 경제개발 청사진으로 가난을 줄이고, 경제를 살리고, 물류비용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올해 GDP의 6.3% 수준인 인프라 지출을 2022년 GDP의 7.3%까지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7월5일 마닐라 마카티에서 안젤리카 케이아스(가운데) 필리핀투자청 국장이 <이코노미 인사이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물론 2017년 상반기 필리핀은 미국 금리 인상, 페소화 약세, 필리핀 국내 정치 불안정으로 2016년 같은 기간에 견줘 외국인 직접 투자 유입이 14% 줄었다. 필리핀 경제가 침제 국면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케이아스 국장은 “현재 필리핀 경제는 ‘골디락스 국면’”이라고 강조했다. 골디락스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할 만큼 과열되지도 않고, 경기 침체를 걱정할 만큼 냉각되지도 않은 경제 상태를 말한다. 골디락스 경제에서는 물가 상승 부담 없이 실업률 하락, 소비 확대, 주가 상승, GDP 성장 등을 실현할 수 있다.
필리핀을 둘러싼 한-중-일 경쟁
이런 필리핀을 놓고 중국과 일본의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를 위해 동맹국인 미국과 거리를 두고 친중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보이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은, 필리핀에서도 민감한 이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그럴 때마다 중국은 필리핀에 더 많은 투자를 약속한다. 중국 투자가 미흡하다 싶을 때는 미국을 전통 우방이라고 언급하면서 줄타기 외교를 이어가고 있다.
심재학 산토 토마스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은행에 맞서기 위해 중국은 자신들이 주도해 만든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를 통해 아세안 지역 국가의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이다. 필리핀은 두테르테노믹스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까지 협상 무기로 사용하며 중국 투자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결국 중국과 필리핀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일본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가 하면,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필리핀에서도 역사적으로 반일감정이 있는 편이지만, 일본의 전략적 투자 협력을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 두 나라의 지원 약속을 받은 필리핀은 철도사업에서 북쪽 라인은 일본이, 남쪽 라인은 중국이 수주하도록 했다.
한국도 문재인 정부 들어서 ‘신남방정책’으로 필리핀 등 아세안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산업통산자원부는 3월 인도·아세안·서남아를 담당하는 아주통상과를 ‘신남방통상과’로 개편했다. 추설희 코트라 마닐라무역관 과장은 “코트라도 최근 동남아팀을 신남방팀으로 개편한 뒤 실무자회의를 열고, 필리핀 등 아세안 국가와 상생 협력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입은행은 앞으로 6년 동안 필리핀에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10억달러(약 1조1250억원)을 제공하기로 하고 사업을 협의 중이다.
전통적인 필리핀 수출 강국인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부상으로 점유율이 주춤한 상태다. 미국은 주력 분야인 식품, 섬유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에서 중국과 아세안에게 밀리고 있다. 일본은 주력 분야인 전자제품에서 한국과 대만 등에 점유율을 잠식당하고 있다. 한국·일본·대만 세 나라는 주력 수출 상품이 겹쳐 경쟁 우위 확보가 관건이다. 반도체, 원자로, 보일러, 기계, 부품, 철도 차량, 전자제품 등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2017년 상반기 한국 제품은 필리핀 수입시장에서 중국과 일본에 이어 3위였다. 하지만 수입된 한국 제품은 80억달러 정도로 중국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필리핀에서 한국 제품은 고품질로 인식된다. 추설희 코트라 마닐라무역관 과장은 “학용품이건, 화장품이건, 중고 전자제품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붙어 있으면 품질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 이런 국가 브랜드 이미지는 우리나라의 강점이다. 한국의 대기업 이미지가 좋은 데다 한류 영향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8년 7월4일 필리핀 마닐라 보니파시오 지역에서 건설이 한창이다. 필리핀에서는 ‘두테르테노믹스’에 따라 도로·교량·공항·항만 등 인프라를 건설하는 ‘빌드, 빌드, 빌드’(BUILD, BUILD, BUILD)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필리핀 진출 전략은
사실 필리핀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많은 중소기업이 고전하고 있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비즈니스 기본 철학을 좀 더 잘 지키는 것이 생존하는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필리핀은 우리와 같은 아시아 국가지만 문화와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현지 일부 기업은 기술과 자본 우위만을 생각해 현지인을 가르치고 이끌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우상 포스코대우 마닐라지사장은 “우리에게 옳았고, 서구에서 옳았다고 여기에서 옳은 것은 아니다. 필리핀을 폭넓게 이해하고, 유연한 사고방식과 열린 마음으로 비즈니스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 이익에만 몰입하는 비즈니스는 곧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심재학 교수의 얘기다. “필리핀이건 베트남이건 우리나라보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떨어진다고 그들이 바보는 아니다. 그곳에서 단기 이익만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장기 비전과 전략으로 서로가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나라를 우리의 소비자로서, 우리의 외교 파트너로 대접해야 한다. 결국 우리와 함께 가야 하는 지구촌의 국가로 대해야 한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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