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퀄컴의 ‘특허 갑질’을 밝혀내 1조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그보다 파급력이 훨씬 큰 ‘시정명령’ 감독에는 손을 놓고 있다. 공정위의 시정명령이 내려진 지 만 2년이 됐지만, 퀄컴의 시정명령 이행은 단 한 곳에 그치고 있다. 공정위가 2년 넘게 조사해 국제 통신시장 질서를 바로잡을 기회를 만들어 놓고도, 정작 중요한 시정조처는 방관하고 있는 셈이다.
공정위는 지난 2016년 12월 “퀄컴이 이동통신과 관련한 표준필수특허(SEP)의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불공정거래를 했다”며 1조31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인텔·미디어텍·삼성전자 등 모뎀 칩세트를 만드는 업체들과 특허 사용권 계약 협상에 성실히 임하라”는 등 세 가지 시정명령을 내렸다. 언론은 1조원이라는 과징금 액수에 집중했지만, 업계는 시정명령이 가져올 변화가 훨씬 크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2년이 지났지만 결과는 미미하다. 24일 <한겨레>가 전해철 의원(더불어민주당)을 통해 확보한 공정위의 ‘퀄컴 시정명령 이행 및 확인 현황’ 자료를 보면, 퀄컴은 올 2월 삼성전자와 ‘휴대폰 및 인프라 장비 관련 특허 라이선스에 대한 수정계약’을 체결하는 데 그쳤다. 엘지(LG)전자나 미국 인텔, 애플, 중국 화웨이, 타이완 미디어텍 등은 아직 퀄컴과 수정계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 퀄컴이 삼성전자와 한 수정계약도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시정명령의 핵심인 모뎀칩 제조와 관련한 특허 계약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공정위의 미온적 태도 탓이다. 공정위 자료를 보면, 공정위는 2017년 2월과 9월, 11월에 시정명령 이행 상황 등을 확인하고 올해 2월 퀄컴으로부터 삼성과 수정계약을 했다는 통보를 받은 뒤로는 8개월째 아무런 확인 조처도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2월과 9월의 경우 시정조처가 가능하다는 통보가 각 업체에 전달됐는지를 확인한 것이어서, 이를 제외하면 실질적 확인은 두 차례에 불과하다.
공정위의 감시 눈길이 느슨해진 사이, 업체들은 퀄컴 쪽과 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하고 있다. 엘지전자의 경우 지난 4~5월께 퀄컴에 수정계약을 요청했지만, 협상이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몇몇 업체가 퀄컴에 협상을 요구한 것으로 알지만, 퀄컴 쪽이 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 규칙상 ‘시정명령에 불복할 경우 30일씩 두 차례 경고하고 그래도 불이행할 경우 고발’하게 돼 있지만, 공정위는 이런 내용을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신영호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은 “시정명령에 시간제한이 없다. 퀄컴이 시정명령을 불이행한다는 것을 (우리가) 파악한다면 조처를 하겠지만,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업계는 과징금보다 시정명령을 훨씬 강력한 조처로 본다. 시정명령이 이행될 경우 업계 전체가 누리는 기대이익은 과징금 1조원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특히 모뎀칩 세트 회사(인텔, 미디어텍, 삼성전자, 화웨이)와 퀄컴이 특허 계약을 맺게 될 경우, 퀄컴이 통신특허를 바탕으로 모든 스마트폰 제조사로부터 특허사용료를 받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퀄컴의 지난해 매출액 232억달러(26조원) 중 27.6%인 64억달러가 통신특허 등 특허권 사업을 통해 발생하며, 특허권 사업에서 거둬들이는 영업이익만 51억달러(79.7%)에 이른다.
5G(5세대) 통신이 본격화하면 관련 특허료가 20조원가량이고, 이 중 절반은 퀄컴 몫이라는 분석도 있다. 세계 최대 스마트폰 제조사인 삼성전자도 연간 1조원이 넘는 특허료를 퀄컴에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 공정위의 결정이지만, 애플, 삼성전자, 인텔 등 주요 글로벌 정보통신기업들에 적용된다. 전 세계 통신업계가 한국 공정위 결정에 주목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퀄컴 역시 1조원의 과징금보다 시정명령을 회피하는 쪽에 집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퀄컴은 2016년 말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와 시정명령에 불복해 소송을 냈고,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퀄컴의 ‘시정명령 효력정지 신청’을 기각했다. 현재 1조원 과징금 부과와 관련해 퀄컴과 공정위가 본안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정위의 모범 조사 사례로 퀄컴 사건을 거론하며, 이 사건을 조사한 직원 2명을 2017년 ‘올해의 공정인’으로 뽑기도 했다.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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