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레이어드 런던정경대학 교수가 28일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OECD 세계포럼 준비기획단 제공
“어릴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면 평생 행복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행복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처드 레이어드 런던정경대학(LSE) 교수는 28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성인기 삶의 만족도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변수는 아동기의 학업 성취도가 아니라 정서적 건강”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청소년의 웰빙(wellbeing)을 측정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6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포럼’에 참석차 방한한 레이어드 교수는 “최근 모든 나라에서 정신 건강이 신체적 건강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확인됐고 특히 정신 건강에 따라 신체적 질환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신 건강은 치료나 예방에서 여전히 소외받기 일쑤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정신 질환을 경험한 사람의 4분의 1만 치료를 받으며, 개발도상국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낮다. 우리나라도 정신 건강을 위해 의료기관 등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는 비율이 9.6%에 그친다. 레이어드 교수는 “정부는 국민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청소년이 학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정신 질환을 예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이나 자해를 시도하는 청소년은 매년 2천명이 넘어 10년째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로 자살이 꼽힌다.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경제자문을 지내기도 한 레이어드 교수는 2011년에 펴낸 저서 <행복의 함정>에서 소득은 일정 정도를 넘어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아무리 많아져도 행복이 커지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날도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매우 낮으며, 그 어떤 나라에서도 소득은 행복의 주요 요소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특히 부유한 나라에서는 소득의 한계효용(소득이 늘 때 추가로 발생하는 만족감)이 낮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을 경제적 이익에 종속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위해 인간관계, 건강 등과 같은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 가치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레이어드 교수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관계지만 일터와 공동체에서 맺는 인간관계도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며 “한국의 경우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이 잦아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은 경제 수준에 견줘 국민 행복도가 낮은 나라다. 유엔이 세계 156개 나라를 상대로 국민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2018년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57위로 조사됐다. 지난해보다 2단계 내려앉았다. 1위는 북유럽의 복지국가 핀란드였다. 이 보고서의 공동 편집자로 참여한 레이어드 교수는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 국민의 행복도가 높았다”고 설명했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학교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가르치며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도록 교육해 사회적 신뢰를 강화했다. 하지만 미국이나 영국은 서로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교육 정책을 펼쳐 상호 신뢰를 떨어뜨렸다.” 경쟁 위주의 교육이 만연한 한국도 사회적 신뢰를 쌓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레이어드 교수는 ‘국민 삶의 질 향상’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 목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유럽에서는 18세기 계몽운동 때부터 행복을 정책의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에는 행복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해 이를 최대화하는 방법을 몰랐지만, 이제 정부가 정신 건강, 가족관계 등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을 파악한 이상 정책의 우선순위를 이에 두고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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