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1일 대한항공 직원들과 참여연대 회원 등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열린 서울의 호텔에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를 촉구했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제공
“의결권 행사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2월14일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ㄱ위원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언론과 재계의 눈길이 쏠린 수탁자책임위 회의에 2019년 들어 네 차례나 참석했다. 한진칼·대한항공, 남양유업, 현대그린푸드 등 경영에 문제 있거나 배당이 적은 이른바 국민연금의 ‘중점관리기업’ 주주권 행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 설치된 수탁자책임전문위는 국민연금기금이 보유한 주식에 대해 수탁자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기구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 국민연금이 수익률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총수 일가 이익을 앞세우느라 정상적인 주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새로 만들어졌다.
ㄱ위원은 국민연금이 2018년 ‘스튜어드십코드’(행동지침)를 도입하고 위원회도 새롭게 출범하면서 많은 기대를 했지만, 올해 그런 기대가 무너졌다고 했다. 그는 “경영계 추천 위원들 반대가 많았고 현실적으로 ‘경영참여’가 실효성 있게 행사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며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 활용에 적극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기관투자자가 고객에게 높은 장기수익률로 보답하기 위해 수탁자 책임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다. 국민연금은 2018년 8월 이 원칙에 따라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기로 했다. 최근 세계 연기금의 경향은 기업 주식을 사놓고 고배당이나 주가 상승만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에서 벗어나, 기업 경영에 관여함으로써 기업가치를 상승시켜 수익률을 높이는 쪽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에 관심 없는 기업에 그 중요성을 주지시켜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 행사해 대기업의 잘못된 경영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그러나 근로자 대표와 지역가입자 추천으로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나 기금운용위에 들어간 일부 위원들은 “국민연금 위원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을 절감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뒤 처음으로 ‘칼’을 휘두를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한진그룹에 대한 주주권 행사는 ‘칼을 빼다가 칼집에 다시 집어넣은 것’으로 일단락됐다. 기금운용위는 설 연휴를 앞둔 2월1일 회의를 열어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에 제한된 수준에서 경영참여 방식의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대한항공에 대해선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앞서 열린 수탁자책임위에서도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에는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한진그룹이 첫 대상이 된 것은 조양호 회장 일가의 ‘땅콩 회항’ ‘물컵 갑질’ 등 잇따른 비정상적인 경영 행태로 기업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은 공개 서한을 보내는 등 경영 개선을 촉구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국민연금에 남은 카드는 경영진을 압박하는 적극적 주주권 행사밖에 없었다.
증권거래법의 ‘5% 규정’과 ‘10% 규정’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의 발목을 잡았다. 5% 규정은 상장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면 주식 보유 상황과 함께 단순투자 또는 경영참여라는 보유 목적을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10% 규정은 10% 이상 보유한 대주주의 보유 목적이 경영참여일 때 6개월 이내 단기매매 차익은 기업에 반환하도록 했다. 기업 내부 정보를 이용해 수익만 올리고 ‘먹튀’ 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규정이다.
기금위는 국민연금 지분이 10% 미만인 한진칼(7.16%)과 대한항공(11.7%)을 분리해 대응했다. 한진칼에는 ‘이사가 회사 관련 배임·횡령죄로 금고 이상 형을 받을 때 결원으로 본다’는 규정을 도입하기 위한 정관 변경을 제안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양호 이사 해임, 사외이사 선임 등 더 강력한 카드는 포기했다. 보건복지부는 “경영진 일가의 일탈 행위로 주주가치가 훼손돼, 최소한의 상징적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는 데 다수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대한항공에 대해선, 국민연금이 투자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바꿀 경우 10% 규정 적용을 받는 탓에 적극적 주주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기금위 ㄴ위원은 “한진그룹이 꿈쩍도 하지 않는데 일부 위원은 실효성 없는 방법만을 쓰자고 했다”며 “일부 위원이 대한항공 경영이나 스튜어드십코드에 관심 있나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미흡한 부분을 점검하는 등 구체적으로 고민했던 경험은 나중에 스튜어드십코드를 (더 적극적으로) 시행할 때 자산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18년 9월20일 수백억원대 상속세 탈루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서울 남부지방검찰청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단기매매차익 논란
논란이 된 단기매매차익 반환이 국민연금의 숙제로 떠올랐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대한항공에 2016~2018년 경영참여를 선언했다고 가정하면, 회사에 반환해야 할 단기매매차익이 469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장기 투자자인 줄 알았던 국민연금이 실제로는 6개월 이내에 사고파는 단기매매를 상당히 많이 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의결권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국민연금이 단기매매차익을 노리는 것은 600조원 넘는 돈을 굴리는 국민연금 규모에 걸맞지 않는 일”이라며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위해 경영참여를 선언하면 매매를 통한 투자수익 극대화를 포기하고, 주주권 활용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 장기적으로 더 높은 차익을 얻겠다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도 “국민연금이 장기 투자자 역할을 한다면 단기매매차익 때문에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선진국 주요 연기금들은 스튜어드십코드 적용과 함께 장기 투자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9.1%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올린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장기적 관점과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를 장점으로 내세운다. 2018년 1월 한국을 찾은 김수이 캐나다연금투자위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좋은 성과를 거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장기적 시야를 들었다. “연금은 앞으로 몇 세대 동안 유지될 수 있는지 봐야 한다. 캐나다연금은 75년 앞을 내다보는 프레임을 가졌고, 이는 특유의 투자 전략으로 이어진다.”
이 밖에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업은 297개(2018년 말 기준)에 이른다. 한국 증시 전체 상장사 2110개의 14.1%에 해당한다.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수탁자책임활동 가이드라인(지침)은 지분율 5% 이상 또는 보유 비중 1% 이상 투자 기업을 대상으로 비공개 대화와 중점관리기업 선정 등 단계별 수탁자 책임 활동을 추진하게 돼 있다. 시장에는 국민연금이 많은 기업 경영에 관여할 능력이 있는지에 의문을 가진 이가 많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많은 기업을 들여다보거나 관심 기업을 계속 추적하는 능력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독립성 강화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적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해 그 의도가 투자자의 장기 수익률 제고인지, 아니면 정치·사회 등 공익 추구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선진국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캘퍼스(미국 최대 연기금인 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 등 개별 공적연금은 고객의 장기 수익률과 상충되는 수탁자 활동을 명확하게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양호와 강성부의 대결
이제 시작이다. 국민연금이 칼을 빼다 말았지만 한진그룹은 2월13일 사외이사 확대 등을 담은 경영 발전 방안을 내놨다. 한진그룹은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고 주주와 소통도 늘리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꿈쩍도 않던 한진이 움직인 것은 국민연금 외에 행동주의 사모펀드인 ‘강성부펀드’도 한진칼 지분 10.81% 등을 확보해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강성부 KCGI 대표가 이끄는 이 펀드는 독립적 사외이사가 참여하는 ‘지배구조위원회’와 ‘임원추천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주주 제안을 했다. 국민연금과 강성부펀드의 지분을 합하면 15%가 넘는다. 조양호 회장 등 특수관계인의 지분(28.95%)에는 못 미치지만, 다른 기관투자자나 소액투자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위협적일 수 있다.
자본시장에서는 조양호와 강성부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와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바 없는 펀드 대표의 대결은 이전이었다면 싱겁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변화는 일방통행식 경영을 했던 대기업에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민연금이 제한적이라도 개입하기 시작한 게 의미가 있다. 대주주와 싸우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단계적으로 나아가다보면 외부 주주들이 단결하는 모습도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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