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 등이 2018년 1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로화 출범 2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최근 이례적으로 ‘중앙은행 중립성 훼손 우려’를 언급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또 다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각국 통화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압력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인플레이션 압력이 거의 없는’ 지금의 경기하강 국면에서 중앙은행이 ‘해야 할 적절한 일’이 무엇이냐는 논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2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춘계회의는 각국 통화 및 경제정책담당자 사이에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우려와 논쟁을 촉발시켰다. 돌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건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다. 그는 회의에서 “나는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 연준을 포함해 다른 여러 나라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매우 근심하고 있다”며 “경제를 조절하는 중앙은행 결정이 경제주체들로부터 신뢰성을 확보하는 요체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독립성”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드라기 총재의 이 발언은 매우 드문 일이라서 크게 주목받았다고 보도했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 뱅커는 정치에 대해, 나아가 다른 경제정책기관이 하는 일에 대해 말을 극도로 삼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연준뿐 아니라 터키와 인도 중앙은행도 최근 정치 쪽으로부터 정책금리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싱가포르 중앙은행 총재 타르만 샨무가라트남도 가세했다. 그는 “좌와 우 양쪽의 포퓰리즘이 중앙은행을 침해하고 있다”며 “정부의 재정정책 역할과 유사하게, 새롭고 더 과감한 경기진작 역할(추가적인 통화정책 완화)을 떠맡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 중앙은행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리스크”라고 말했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들은, ‘거의 명백하게 부재한 인플레이션 위협’이 더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펴라고 정치가들이 압박을 가하기 쉬워진 조건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드라기 등 일단의 중앙은행 뱅커 쪽으로부터 비판 공세를 받은지 이틀 뒤인 지난 14일, 트럼프 대통령은 또다시 즉각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연준이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잘했다면 미국 주가가 5000에서 1만포인트 추가 상승했을 것이고 미국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4%대 이상이 됐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양적 긴축은 살인자다. 정확하게 그 반대 정책(양적 완화)를 펴야 한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없다는 점을 역시 강조했다.
요즘 이코노미스트들의 염려는 “보다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를 점증하게 만드는” 몇몇 요인, 즉 각국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인플레이션 압력은 거의 부재한 환경에 있다. 통화정책을 완화 기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가 커지면서 중앙은행 독립에 대한 인식도 점차 약화되고 있는 셈이다. 거의 제로금리 시대에 접어들어 통화정책 탄약이 바닥나는 일도 인플레이션 부재와 더불어 중앙은행이 직면한 도전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보도했다. 금융위기의 역사를 분석한 책 <이번엔 다르다>의 저자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전 국제통화기금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한 강연에서, ‘중앙은행이 독립적이지 못하면 악마가 감옥에서 탈주해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중앙은행의 전통적 우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전 세계적으로 물가상승률이 낮은 상황에서 ‘감옥 탈주’ 우려는 더 이상 긴급한 위협이 아니며, ‘독립성 집착’이라는 대의는 감퇴하고 있다는 얘기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파이낸셜타임스>는 “10년 전(금융위기 당시)에는 중앙은행 독립성이 확고하게 인정받았다”며,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재앙을 길들이고 금융위기와 싸우며 위기를 완화시키는 데 선두에 섰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정부 재정적자가 폭발하고 국가부채 공포가 커지던 당시, 중앙은행이 경제활동을 자극하고 시장 공포를 진화하는 ‘가장 유익하고 빼어난’ 통화정책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위기에 맞서 무엇이든 일을 떠맡아 하겠다”는 중앙은행의 자신감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있고, 이제는 중앙은행이 공격에 당면하고 있는 양상이다. 로고프는 “일부 중앙은행은 통화정책 결정에서 유연성이 필요했는데도 인플레이션 목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직적 태도를 보였다”며, 금융위기 파이터로서 좋았던 시절에 대한 중앙은행의 역할은 “합당한 수준 그 이상으로 과도한 평판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고프의 견해는 다소 복잡한 데가 있다. 로고프는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이 대단한 일을 해왔고 ‘독립 중앙은행’에 감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며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또 닥쳐올 수 있고, 그래서 중앙은행 독립성을 완전히 훼손하면 그런 나라들은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로고프는 지금의 중앙은행은 적절한 수준의 독립성과 유연성을 함께 발휘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조합’을 요구받고 있다고 말한 셈이다.
흥미로운 건 몇몇 국가의 중앙은행 내부에서조차 ‘과도한 독립성 집착은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레셋야 카냐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중앙은행 총재는 “중앙은행 독립성은 극도로 중요하다”면서도 “또한 중앙은행은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확실하다. 양자는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스티븐 폴로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역시 “2008년 금융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뒤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커졌다”며 “어쨌든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하는 행동이 적절한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중앙은행 통화정책은) 매우 모호한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우려가 표출되고 있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악셀 베버 유비에스(UBS) 회장(전 독일 중앙은행 총재)는 12일 “중앙은행에 대한 요즘의 정치적 개입 시도가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연준의 신뢰성과 독립성은 어쨌든 위협받지 않고 있다. 연준은 자신이 할 일이 뭔지 안다”며 “정치가들이 다른 무엇을 하라고 요구해도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경험적으로 중앙은행은 정치적 압력에 굴복 당하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1984년 레이건 행정부 당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백악관 도서관에 불려가 레이건 대통령 및 제임스 베이커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과 만난 일화를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베이커는 “선거 이전에 정책금리를 올리면 안된다”고 주문했는데 볼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레이건의 침묵은 불만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볼커)고 한다. 이 내용은 2008년에 볼커가 연준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로, 지난 12일 연준이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중앙은행이 정치적 논쟁 와중에 휩쓸리고 있는 건 브렉시트(Brexit) 혼돈을 겪고 있는 영국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영국은 요즘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의 후임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필립 하몬드 영국 재무장관은 “누가되든지 영란은행 총재는 브렉시트라는 정치적 논쟁의 한 부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라서 일부 후보자들이 총재직 지원을 단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13일 중앙은행은 우울한 글로벌 경제환경에서 여전히 “밝은 지점”이라며 “작년 경기 하강에 대응해 경기흐름을 위쪽으로 반전시키고 더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지향해 각국 경제에 즉각적인 영향을 발휘했던 것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라가르드는 또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갖고 그동안 일을 잘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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