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대선공약인 상법개정의 일부 핵심내용에 대해 포기 의사를 내비치고, 공정거래법 전면 개정안의 국회 통과도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촛불정부’의 경제개혁이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2일 공정위원회에 따르면 김상조 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상법 개정안 중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에 대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등 그동안의 상황 변화를 감안해 우선 순위와 내용을 조정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의결권을 1명의 후보에게 집중해 투표할 수 있는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문재인 대통령이 재벌총수 전횡 방지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대선공약으로 내건 상법 개정안의 핵심내용이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5월 범정부 차원에서 만든 경제민주화 태스크포스의 책임자라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니라 현 정부의 경제개혁 입법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문재인 정부 2년간 핵심 경제개혁 공약에 대해 후퇴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개혁진보진영은 상법개정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경제개혁연대는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근거로 한 상법 개정안 조정은 문재인 정부의 성과조급증을 보여주는 것으로 경제정책 기조 변화와 경제민주화 공약 후퇴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김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까지 소장을 맡았던 시민단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문재인 정부가 공정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던 공정거래법 전면개정도 한국당의 반대로 지난해 국회 통과에 실패한 데 이어 올해도 진전을 못보고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는 대선공약인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 적용대상 확대, 경성담합에 대한 공정위 전속고발제 폐지 등이 담겨 있다. 공정위는 선거제 개편 관련 패스트트랙에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함께 상정되기를 기대했으나 무산됐다. 또 궁여지책으로 한국당의 반발이 약한 내용만이라도 우선적으로 국회에서 통과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한국당의 반응은 싸늘하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 안건 상정은 됐지만, 심사는 아직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또 설령 한국당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국회를 통과해도 개혁진보진영으로부터 ‘속빈 강정’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상법 개정안의 우선순위 조정이나 공정거래법 부분개정 추진은 한국당에 막혀 ‘올스톱’된 개혁입법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고육지책의 성격이 강하다. 공정위도 하반기 정기국회로 넘어가면 내년 총선 일정 때문에 사실상 법 개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높다. 공정위 신영호 경쟁정책국장은 “법 개정안 중 피심인 방어권 보장 강화 등 법집행절차 투명화 분야 등은 한국당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가능한 부분부터 돌파구를 열고 나머지는 단계적으로 풀어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법이나 공정거래법 개정이 무산 위기를 맞은 것은 한국당의 탓이 크지만, 문재인 정부의 개혁입법 전략의 실패라는 지적도 많다. 개혁진보진영은 정권의 힘이 있는 집권 초에 개혁입법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상조 위원장은 이를 개혁조급증이라고 비판하며, 법집행 강화-재벌의 자율개혁 유도-법제도 개편이라는 3단계 재벌개혁론을 제시했다. 결국 법제도 개편이 2018년으로 미뤄지면서, 개혁 실기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고려대 교수)은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추진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으나 실적은 저조하다”며 “대선공약과 국정과제를 변경하거나 포기하려 한다면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중요한 법개정일수록 정권 초에 시행해야 했다”며 “공정거래법과 상법 개정을 뒤로 미룬 것은 김상조 위원장이 경제민주화가 소득주도성장의 매우 중요한 선결과제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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