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와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를 고리로 단단히 손을 잡았다. 경기 하락 국면에서 정부는 ‘산업정책 미비’라는 비판에 맞닥뜨리고 있고,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 둔화에 따라 비메모리 분야로 무게추를 옮길 수밖에 없는 터다. 30일 정부와 삼성이 함께 여는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 발표회는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 될 전망이다. 시점은 대단히 미묘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횡령·뇌물공여 재판의 대법원 선고가 5월로 예측되고 있어서다.
정부는 이날 삼성전자 화성사업소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발표하고 이곳에서 7나노 극자외선(EUV) 공정으로 생산된 삼성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출하 기념식 등을 진행한다. 이 행사에는 정부 인사들과 함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석희 에스케이(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 등 반도체업계 고위관계자들이 ‘총출동’한다. 정부가 삼성전자를 핵심으로 한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육성 계획을 대대적으로 선포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정부와 삼성의 ‘주고받기식’ 비메모리 반도체 드라이브는 지난 1월 본격화했다. 1월4일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을 찾아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 강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고, 같은 달 10일엔 삼성 수원사업장을 방문한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시스템 반도체 등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달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기업인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이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의지를 묻자 이 부회장은 “새로운 시도”를 강조하며 화답했다. 3월19일 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비메모리 경쟁력을 높여 메모리 반도체 편중 완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밝힌 뒤 정부는 4월22일 ‘비메모리, 바이오, 미래형 자동차’를 3대 중점 육성 산업으로 선정했다. 이틀 뒤인 24일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며 호응했다.
문 대통령은 2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3대 중점 육성 산업에 ‘우선 지원’ 계획을 밝히며 비메모리 반도체와 관련해선 “삼성이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은 국가 경제를 위해 매우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삼성을 직접 언급한 것이 두드러졌다.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육성은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평가된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과 수요의 급락으로 메모리 분야에 80% 비중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반면 비메모리 1위인 인텔은 올해 1분기 반도체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1분기 실적은 마침 정부와 삼성이 함께 비메모리 비전을 선포하는 30일 발표된다. 반도체가 국내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산업구조에서 삼성의 실적 악화는 한국 경제를 흔드는 측면이 있다.
정부 주도의 이번 움직임에 대해선 너무 조급해 보인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형준 서울대 교수(재료공학)는 “비메모리 산업으로의 전환은 십수년 전부터 전문가들이 강조하던 것이다. 정부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에 1조원을 투자하는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는 여러 번 시도 끝에 지난 25일에야 통과됐다. 뒤늦게 급하게 추진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발표 시점과 관련해선 비판이 쏟아진다. 법조계에선 경영권 승계 관련 이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5월께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 부회장은 지난해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대법원 판결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행사가 진행되면 대법원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게 뻔한데도 진행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경제 하락 국면에서 정부는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고 이 부회장은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을 앞세운 정책 기조와 관련해 “소득주도성장에서 재벌 의존 성장 전략으로의 선회가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이에 대해 여권 관계자는 “새 성장 동력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정경유착할 일은 없다. 산업정책과 과거 적폐 청산은 분리해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창립 40돌을 맞은 2009년 10월 ‘비전 2020’을 발표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그해 12월31일 ‘원포인트’ 사면을 받은 이건희 회장은 이듬해 5월 ‘5대 신수종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대법원 선고를 앞둔 이재용 부회장은 최근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송경화 이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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