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대어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미-중 무역 분쟁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대외적 요인으로 주식시장의 불투명성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현대오일뱅크·교보생명·롯데호텔 등 상장을 준비했던 주요 대기업이 내부 사정으로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올해 기업을 공개하기로 했지만 상장을 미뤘다. 현대중공업지주 계열사로 석유정제 사업을 하는 현대오일뱅크는 2018년 매출이 21조원에 이른다.
애초 현대중공업지주는 2018년 하반기에 최대 10조원에 이르는 현대오일뱅크 IPO를 통해 대규모 자금 확보에 나설 예정이었다. 핵심 계열사 지분을 팔아 재무 건전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말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 현대중공업지주 부채는 12조7936억원, 자본총계는 10조5541억원이다. 부채비율은 121.2%다. 전년보다 빚이 늘면서 부채비율도 14%포인트 늘어났다. 차입금은 7조8747억원으로 2017년 말 6조3312억원에 견줘 24.3% 늘었다.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은 4조5511억원이다. 전체 차입금 절반에 이른다.
하지만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로 금융 당국의 회계감리가 강화돼 상장 계획이 지연되면서 자금운용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현대오일뱅크는 2018년 IPO를 진행하며 다국적기업 쉘과의 합자회사인 현대쉘베이스오일을 자회사에서 관계회사로 바꾼 게 문제가 돼 감리 대상에 올랐다.
결국 현대중공업지주는 IPO를 연기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와 1조8천억원 규모의 ‘프리 IPO’(상장 전 지분 투자) 투자계획을 맺었다. 프리 IPO는 정식 IPO를 하기 전에 미리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중공업은 아람코가 현대오일뱅크 지분 최대 19.9%를 최대 1조8천억원에 인수할 계획이라고 1월28일 공시했다. 4월15일 현대중공업지주가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을 보면, 두 회사는 현대오일뱅크 지분 17.0%를 1조3750억원에 아람코에 파는 계약을 했다. 아람코는 세계 원유 생산량의 15%를 공급하는 세계 최대 석유회사로, 에쓰오일 지분도 63.4%를 갖고 있다. 아람코는 이번 투자로 현대오일뱅크 2대주주로 올라선다. 지분 매각에 따라 현대중공업지주의 지분율은 74.1%로 떨어졌다. 앞으로 아람코가 콜옵션(지분을 살 권리)을 행사하면 지분율은 71%까지 낮아진다.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과 투자자 갈등
또 다른 대어로 평가받은 교보생명도 상장을 미뤘다. 앞서 교보생명은 2018년 8월 국내외 주요 증권사에 IPO 제안 요청서를 보낸 뒤 NH투자증권, 크레디트스위스(CS) 등 국내와 외국계 증권사 1곳을 대표 주관사로 선정했다. 올해 초 신창재 회장은 임원과 팀장급 경영전략회의에서 상장을 ‘제2의 창사’에 비유하면서 의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교보생명은 2022년부터 시작되는 새 국제회계제도(IFRS17)와 1년 앞서 시작하는 신지급여력제도(K-ICS)를 앞두고 대규모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IPO가 필요한 실정이다. 새 회계제도가 시작되면 보험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해 부채비율이 오르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자본확충을 해야 한다. 교보생명은 새 회계제도에 대응하려면 최소 2조원에서 최대 5조원이 필요하다. 여기에 교보생명은 2015년 9월까지 기업공개를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재무적투자자(FI)와 계약이 얽히면서 상장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신창재 회장과 재무적 투자자 분쟁은 2012년 당시 2대주주였던 대우인터내셔널이 갖고 있던 지분 24%를 팔아 경영권이 위협받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교보생명은 어피너티·IMM 등 사모펀드와 싱가포르투자청 등을 끌어들였고 이들 컨소시엄은 교보생명 지분 24%를 주당 24만5천원, 1조2054억원에 사들였다. 당시 신 회장과 투자자는 3년 안에 교보생명이 상장되지 않으면 신 회장 개인을 상대로 풋옵션(지분을 되팔 권리)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계약을 맺었다.
재무적투자자들은 3월20일 민사분쟁 중재기관인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를 신청했다. 중재 관건은 풋옵션 행사 가격이다. 재무적투자자는 풋옵션 가격을 1주당 40만9천원으로 제시했고, 신 회장은 생명보험사 시장가치가 떨어져 20만원 중반대에 불과하다고 맞선다.
2018년 교보생명 사업보고서를 보면, 신창재 회장의 지분율은 33.78%다. 여동생과 계열사 임원의 지분을 합쳐도 우호 지분은 36.93%에 그친다. 신창재 회장 지분은 재무적투자자 지분(지분율 24%)과 고작 12%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러다보니 신 회장이 IPO를 위해 신주를 상장할 경우, 신 회장 지분율이 떨어져 경영권이 더욱 약화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상장이 상당 기간 늦춰질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호텔롯데 상장, 신동빈 지배구조 과제
호텔롯데 역시 IPO에 난항을 겪고 있다. 호텔롯데는 일본 롯데홀딩스와 일본 롯데 계열사가 지분 99.28%를 갖고 있다. 2017년 롯데지주가 출범하면서 대부분 계열사가 자회사로 편입됐지만, 롯데캐피탈·롯데건설·롯데물산 등 일부 계열사는 여전히 호텔롯데가 최대주주다. 롯데 지배구조의 한 축인 호텔롯데는 일본계 법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셈이다.
롯데는 호텔롯데 상장으로 일본 계열사들이 가진 지분율을 떨어뜨리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지배력을 높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간지주사 구실을 하는 호텔롯데 상장이 필수적이다. 신 회장의 숙원 사업이라고도 한다. 신 회장은 2015년 호텔롯데를 상장해 일본 쪽 지분율을 50% 밑으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신동빈 회장은 2016년 10월 지배구조 개선을 뼈대로 한 경영쇄신안을 내놓았다. 형제 경영권 분쟁과 검찰의 비리 수사 등 위기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이었다. 호텔롯데 상장은 롯데그룹 지배구조와 맞물려 있다. 하지만 상장 작업은 롯데그룹을 향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중단됐다.
호텔롯데 상장을 위해서는 롯데면세점 실적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해 상장 시점을 실적 개선 시점에 맞춰
조정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호텔롯데는 2016년 기업공개(IPO) 추진 당시 영업가치가 12조원대였지만, 중국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호텔롯데 성장을 이끄는 면세점이 타격을 받아 기업가치가 급락했다. 호텔롯데 면세사업부는 호텔롯데 전체 매출의 80%가 넘는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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