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를 생각하면 언제나 불안과 결핍을 먼저 떠올린다. 쪽방에서 폐지 줍는 독거노인이나 요양원에 수용된 치매 노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노후의 가난’은 실제보다 훨씬 강한 공포로 다가온다. 재산을 다 쓰지 못할지라도 단단히 챙겨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많은 부가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안다. 일정 수준을 넘으면 소득과 행복의 상관계수가 0에 가까워진다는 이론이 있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 등은 2010년 미국을 기준으로 그 수준이 연간 가계소득 7만5천달러(약 8900만원)라고 주장했다.
나이 들어 돈이 들어가는 일이 적지 않지만, 돈으로 누릴 만한 게 그렇게 많지도 않다. 중견기업 P부장은 대한민국 최고 부자인 모 그룹 회장 동영상을 본 뒤 충격받았다. ‘품격 있는 노후’는 천문학적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당연한 깨달음이 뒤통수를 내리쳤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만족은 나이에 반비례한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살아가는 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적게 갖고, 적게 쓰는 것이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일 수 있다는 ‘섭리’는 나이 들수록 깨치기 쉽다.
자연인의 로망
2012년 방영을 시작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은 중장년 남성의 사랑에 힘입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원시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은 중장년 남성의 로망이다. 전기와 수도 같은 기본 편의시설도 없는 극단적 생활까지는 모르지만 대다수 중장년은 어느 정도 불편은 감수한다는 마음가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물론 방송으로 보는 것과 그런 일상을 사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방송에서 소개된 자연인은 대부분 도회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절실함이 외딴 산속으로 파고든 이유이고, 그 척박한 환경과 외로움을 견디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노후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다. 퇴직과 함께 직장을 중심으로 지속돼온 업무와 관계, 일상이 상당 부분 없어진다. 수입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그에 따르는 성가심도 소멸된다. 결핍이나 소외이지만 동시에 삶의 여백을 제공한다.
지난해 정년퇴직을 한 J씨는 강원도 홍천의 전원주택에서 ‘준자연인’의 삶을 누리고 있다. 현대 문명이 주는 편의를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과의 만남, 텔레비전 시청 같은 번잡함을 줄이고 집 뒤에 있는 산을 오르내리며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려 한다.
삶을 단순화하고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린 채 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젊을 때는 돈과 물건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더 크고 좋은 집, 더 편안한 생활을 찾기 마련이다. 주변과의 비교는 그런 욕망을 더욱 자극한다. 결혼, 육아, 자녀 교육, 내 집 마련 등 삶의 단계마다 수시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인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삶을 사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풍요가 줄어드는 노후는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충만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기다. 한때 꿈꿔봤을 법한 ‘최소주의 생활’(미니멀 라이프)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 가진 게 줄어드는 걸 소박한 삶을 사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물건과 거리를 두고 소비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내면의 행복에 더 눈을 돌리게 된다. 최소주의 생활을 권장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얘기다. 또 불편하고 거친 것이 노후에는 도움이 된다. 기사 딸린 자가용이 없는 것이 한 발짝이라도 더 걷게 만든다. 제 손으로 뭔가를 차려 먹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건강장수에 도움이 된다. 거친 음식이 흔한 당뇨와 혈관 막힘의 위험을 줄인다.
인간적 사회주의
나이 든 사람들 사이의 ‘웃픈’ 이야기는 대부분 돈과 관련돼 있다. 자식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도금한 금송아지라도 서랍에 넣고 있어야 한다는 우스개 같은 소리가 대표적이다. 자식 발걸음이 끊이지 않도록 하려면 손자손녀가 올 때마다 10만원씩 쥐어줘야 한다는 ‘요령’도 자주 공유된다.
재산을 허투루 쓰거나 자녀에게 온전히 물려준 채 불행한 노후를 맞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돈에 저당 잡히지 않을 자유를 꺼릴 이유는 없다. 돈으로 교환되지 않는 생활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 그 길이다. 단지 짠돌이처럼 돈을 쓰지 않는 것과 자발적 가난은 다른 차원이다. 의미 있는 지출은 아끼지 않더라도 단순한 욕망의 충족은 자제하는 삶이다.
중견기업 P부장은 정년퇴직을 자발적 가난의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한다. “인생을 간소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삶이 주는 여유가 좋다.” 높은 지지율에도 재출마 요구를 뿌리치고 평범한 농부로 되돌아간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은 그가 가장 닮고 싶은 모델이다.
P부장은 그동안 자산을 늘리고 돈을 덜 써 노후 리스크를 줄이는 데 주력해왔다. 퇴직 이후에는 되도록 돈으로 거래되는 것과는 거리를 둘 생각이다. 돈으로 얻을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에 더 무게를 두려 한다.
그는 스스로를 ‘저소비형’으로 규정한다. 생활 필수품이나 여행 등 체험 외에 물품 소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효용가치를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별일이 없다면 하루 1만원으로 생활하려 한다. 교통비와 점심값으로 하루를 느긋하게 보내고, 취미활동이나 친구들과 만남 등 ‘소소한 사치’를 추가한다면 달리 바랄 게 없다. 넘치는 시간을 산과 도서관, 공원 등 돈이 없어도 되는 곳에서 보낼 준비가 돼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진 것과 쓰는 것의 상관관계가 줄어든다. 사실 노후야말로 가진 만큼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쓰는 게 자연스러운 시기다. 자녀에게 물려주는 데 집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데도 한결 너그러워진다. 각자도생의 천박한 자본주의보다 더불어 사는 인간적 사회주의가 적합한 시기가 노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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