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지식연구소 ‘공방’, 참여연대는 2019년 6월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제도 개혁 방안’을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한국 정부의 ‘밀실주의’는 국민 세금으로 해외 투자자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제도 사건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영국 고등법원의 기각 판결로 한국 정부의 첫 패소가 확정된 ‘다야니 사건’의 중재 판정문이 1년이 넘도록 공개되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아이에스디에스란 외국인 투자자(기업, 개인)가 자신이 투자한 나라에서 공정·공평 대우 위반 등 국가의 ‘부당한 조처’나 대우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할 때 이를 해결하는 사적 분쟁 해결 절차다. 오로지 투자자만 분쟁을 제기할 수 있고, 투자자가 제기하면 국가는 피청구인으로 무조건 참여해야 하므로 ‘게임의 룰’이 국가에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란 다야니 집안이 2010년에 대우일렉트로닉스를 팔 때, 채권단과 인수계약을 맺었다가 계약을 해지당하고 계약금을 몰수당하자 한국 정부를 상대로 아이에스디에스를 제기했고, 유엔 상거래법위원회(UNCITRAL)는 중재판정부를 구성해 한국 정부가 6800만달러(약 790억원)를 배상하라고 지난해 6월 판정했다. 이 판정 직후 다야니 쪽은 187쪽의 판정문 중 일부를 담은 보도자료를 내고, 이 내용은 국제중재사건 보도 매체인 <글로벌 중재 리뷰>(GAR)가 보도했다.
기사 내용을 보면, 중재판정부는 당시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최대 주주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였는데, 캠코가 채권단의 계약해지 결정에 불공정하게 개입했고 이는 한국 정부가 캠코를 앞세워 채권단 결정을 간접적으로 지배한 것이라 판단했다. 이런 한국 정부의 조처에는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가 영향을 줬다는 게 중재판정부의 견해다. 이는 “한국과 이란 양국 투자자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한-이란 투자협정(BIT, 1998년)상의 공정·공평 대우 보장 및 신의성실 원칙 위반이라는 것이다. 앞서 다야니 쪽은 채권단의 계약 파기가 불법이라며 한국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는데, 중재판정부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중재판정문을 공개하라고 금융위원회에 정보공개 청구서를 냈다. 하지만 금융위는 “중재판정문 취소소송을 영국 고등법원에 제기했는데 상대방인 다야니 쪽의 동의 없이는 공개할 수 없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미국과 캐나다는 중재의향서가 접수되면 그때부터 정부 누리집에 관련 정보를 공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이에스디에스 패소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영국 고등법원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융위는 “다야니 가문의 중재 신청은 한국 정부가 아닌 채권단(39개 금융기관)과 벌인 법적 분쟁 내용이므로 한-이란 투자협정상 아이에스디에스 대상이 아니다. 채권단 대표인 캠코는 한국 국가기관이라 볼 수 없고, 캠코의 행위가 한국에 귀속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 고등법원은 캠코가 정부 통제를 받는 공공기관이라며 한국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야니 사건은 외국 투자자가 낸 아이에스디에스에서 한국 정부가 패소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한국 정부는 다야니 쪽이 채권단에게 지급했다가 몰수당한 계약금 578억원에다 그때부터 발생한 지연이자, 다야니 쪽이 쓴 변호사 비용(200만달러·약 23억원) 등을 모두 물어줘야 한다. 계약금은 채권단 계좌에 남아 있어 그대로 반환하면 되지만 지연이자 등은 세금으로 내야 한다.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주요 기업 대주주 경영권을 외국 기업이 인수하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점에서, 다야니 사건은 2012년 5조원대의 청구서를 한국 정부에 보낸 사모펀드 론스타 아이에스디에스 사건과 닮았다”며 “판정문을 즉시 공개해 패소 이유를 규명하고 사건 진행 과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7년째 중재 심리가 진행 중인 론스타 사건의 진행 상황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중재 심리는 2016년 6월 이후 열리지 않는데도, 최종 판정이 나오지 않고 있다.
금융위는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다야니 아이에스디에스) 판정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필요한 후속 조처를 취할 것”이라며 “모든 절차가 종료된 이후 관련 법령 등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세한 내용을 공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만 밝혔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