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들로 인한 환경오염 때문에 6개월 동안 폐쇄됐다가 2018년 10월 재개방된 필리핀 휴양지 보라카이의 전경. REUTERS
한국에서도 ‘은퇴이민’은 낯설지 않은 단어다. 고령화가 앞서 진행된 선진국에선 퇴직 뒤 생활비가 싼 나라로 이민을 떠난 중장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웃 일본에서는 베이비부머를 말하는 단카이 세대(1947~1949년 출생)의 대규모 정년퇴직 즈음부터 은퇴이민에 관심이 본격적으로 고조됐다.
외국살이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언어와 생활방식의 차이는 나이 든 사람에게 큰 고민거리다. 그런데도 굳이 외국으로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 더 나은 삶이다. 과거에는 주로 일자리·자녀교육 등이 이민 가방을 싸는 직접적 이유였고, 목적지는 대부분 선진국이었다. 은퇴이민은 잘 사는 나라의 두꺼운 이민 장벽을 넘어 현지에서 뿌리내리려는 게 아니다. 생고생하며 성공하겠다는 ‘아메리칸 드림’과는 거리가 멀다. 초경쟁 사회인 한국 탈출이 주목적인 젊은이와도 다르다. 좀더 노후를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일 뿐이다. 돈벌이 걱정에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여서 가능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은퇴이민에선 저렴한 생활비를 비롯해 건강관리, 기후, 치안, 생활편의, 비자 요건 등이 주요한 고려 요소로 꼽힌다. 이런 조건을 다 갖춘 곳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어디서 살든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맞느냐가 중요하다. 변화와 도전이 두렵지 않다면 그런 곳을 국내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받는 연금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곳이라면 얼마든지 이민을 검토해볼 만하다.
은퇴 뒤 살기 좋은 나라
미국 이주정보업체 인터내셔널리빙은 해마다 은퇴생활 하기 좋은 나라의 순위를 발표한다. 미국인 관점이 많이 반영된 탓에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남미 나라의 선호도가 높게 나온다. 2019년에는 파나마, 코스타리카, 멕시코, 에콰도르가 1~4위를 차지했다. 매년 조사에서 상위권에 드는 나라다. 아시아에선 말레이시아와 타이,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0위권에 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인이 선호한다. 최소 비용으로 서유럽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다. 이들 나라의 대부분 지역에서 부부가 2500달러(약 290만원)로 한 달을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생활비는 한국에서 드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불가리아 다음으로 물가가 싼 나라다. 공공보건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 외국인 거부감이 비교적 낮은 장점도 있다. 유럽생활을 맛보고 싶다면 이 두 나라가 최적이다.
중남미는 한국인에게 낯선 곳이다. 너무 멀고 치안이 좋지 않다. 마약 범죄조직의 본거지라는 이미지도 강하다. 그러나 고정관념과 달리 현지 사람들이 친절하고, 물가·기후·건강 등 여러 면에서 비교우위가 있다고 한다. 파나마, 멕시코 등은 60살 이상 퇴직자를 위한 특별할인 제도를 갖췄다. 20년 이상 해외 도주를 했던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부자의 마지막 은거지는 중남미의 에콰도르였다.
은퇴 자산이 넉넉지 않은 한국과 일본의 퇴직자에게는 동남아 인기가 높다. 비행기로 예닐곱 시간이면 도착한다. 관광·업무 등으로 방문한 경험이 있어 친숙한 곳이다. 이들 나라는 무엇보다 장기체류 요건이 까다롭지 않다. 타이나 필리핀은 3천만원 이내, 말레이시아는 9천만원 정도의 은행잔고를 증명하면 50살 이상 외국인에게 장기체류 비자가 나온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룸푸르와 페낭, 타이의 방콕·치앙마이·파타야, 인도네시아의 발리, 치안이 좀 걱정이 되는 필리핀에선 세부·보라카이 등 관광지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 대표적인 은퇴이민 후보지다.
해외에서 여러 달 살기
나이가 들어 원래 살던 데가 아닌 곳, 그것도 다른 나라에 다시 정착하는 데는 상당한 결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오래 머무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면 굳이 한국을 등질 필요는 없다. 삶의 터전을 완전히 옮길 이유는 없다는 의미다. 특정한 나라의 특정 지역 한 곳만 정하느라 골치를 썩일 필요도 없다. 마음에 드는 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는 방법이 있다. 거기에 드는 재정·정서·육체적 부담이 자신에게 너무 크지 않다면 훨씬 환영받을 만한 선택지다.
요즘은 해외여행에서도 발도장만 찍고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일정 기간 ‘머무는 여행’이 주목받는다. 여행과 거주를 적절히 섞어,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경험이 주는 재미와 여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다만, 시간과 돈이 뒷받침되지 않아 하지 못할 따름이다.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 사람이 세계를 떠도는 삶을 살려면 돈을 벌고 모아야 가능한 물질적 풍요를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2년 동안 60여 도시를 여행한 뒤 <한 달에 한 도시>라는 책을 쓴 김은덕·백종민 부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물가가 비싼 이탈리아의 대표 관광지 피렌체 같은 곳에서도 100만원 남짓으로 한 달을 버텼다고 말한다.
젊은이와 달리 퇴직자는 이런 삶을 위해 일자리와 시간을 포기하는 ‘기회비용’이 들지 않는다. 중견기업 P부장은 몇 년 전부터 포털 카페 ‘일 년에 한 도시 한 달 살기’에 가입해 정보를 모으고 있다. 경험자 체험담을 통해 ‘도상연습’도 한다. 젊은 부부나 어린 애를 둔 회원이 대다수여서 중장년 퇴직자 기대치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지향점은 같다.
P부장은 달마다 나오는 연금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 리스트를 만들 계획이다. 한 곳에서 한두 달 지내다 새로운 곳으로 옮기면서 사는 것을 꿈꾼다. 북미와 유럽 선진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에서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몇 달씩 지낼 수 있다. 인근 나라로 옮겨가기 때문에 이동 비용도 부담스럽지 않다. 계절에 따라 따뜻하거나 선선한 곳을 선택할 수 있다. 일찍 사면 비행기 표 가격이 훨씬 줄어든다. 젊은이는 방문 국가 숫자에 무게를 두기도 하지만, 은퇴자에겐 어디든지 가볼 수 있는 넉넉함이 소중하다. 여행과 생활의 중간 어느 지점에서 즐기는 은퇴한 노마드(유목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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