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대국민 사과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행보가 발빠르다.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만난 데 이어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국외 전진기지인 중국 시안 공장을 찾았다. 지난 2010년 그의 부친 이건희 회장이 퇴진 약속을 뒤집고 경영에 복귀한 후 행보와 닮은 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8일 삼성 쪽 설명을 들어보면, 이 부회장은 이날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지난해 2월 이후 1년 3개월만의 현지 행보다. 닷새전인 지난 13일에는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을 삼성에스디아이(SDI) 천안사업장에 초청했다.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인 ‘전고체 배터리’가 대화 주제에 올랐다. 이 부회장은 이날 “과거에 발목 잡히거나 현재에 안주하면 미래는 없다. 거대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이런 행보는 지난 6일 대국민 사과에서 “과감한 신사업 도전”을 언급하며 ‘새로운 삼성’을 선언한 것과 맞닿아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재계 인사들은 드물다. 단순한 선언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줄 필요가 이 부회장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그의 경영권 승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 관련 검찰 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것도 이 부회장이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배경으로 꼽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18일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시안반도체 사업장을 찾아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뒤 중국을 방문한 글로벌 기업인은 이 부회장이 처음이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을 둘러싼 경영 환경도 ‘총수’ 이 부회장의 행보를 설명하는 요소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등 주력 제품의 수요가 줄면서 올 2분기(4~6월) 영업실적 악화가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미·중·일 각국이 자국제조(self-sufficiency) 전략을 강화하는 등 공급망과 판매망 자체의 격변도 예고되고 있다. 특히 지난 15일(현지시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 세계 1위 대만 티에스엠시(TSMC)의
미 공장 신설 계획 발표는 삼성이 중국과 미국 모두의 입맛에 맞는 최적의 대응 방안을 내놔야할 시간이 임박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회동이나 현지 방문을 넘어 좀더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내놓을 것으로 본다. 사업 포트폴리오의 대전환보다는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신사업 분야와 관련한 대규모 인수합병이나 투자 계획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4대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현지 방문이나 총수들 간 회동만으로는 ‘뉴 삼성’ 행보의 전부로 보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고 말했다.
실탄은 넉넉하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1분기 실적발표회(IR)에서 밝힌 현금과 현금성 자산 등은 113조원 수준에 이른다. 삼성전자 최대 인수합병 사례로 꼽히는 지난 2016년 11월 미국 오디오 회사 하만(약 9조2천억원) 매입을 넘어서는 빅 딜(Big Deal)에 나설 수 있는 자금 여력이다.
시장에선 대형 인수 합병보다는 기존 투자 규모를 늘리거나 합작 투자에 나설 가능성을 좀더 높게 본다. 김영우 에스케이(SK)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도 미국 텍사스 오스틴공장에 비슷한 규모의 투자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미국 투자 발표에 앞서 국내 투자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이 부회장의 행보는 지난 2010년 3월 이건희 회장의 경영복귀 당시와 엇비슷해 보인다. 이 회장은 경영 복귀에 대한 비판 여론을 ‘위기론’을 앞세워 무마했다. 당시 이인용 커뮤니케이션 부팀장(부사장·현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위원)이 전한 이 회장의 발언은 이렇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앞만 보고 가자.”
구본권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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