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사회경제구조는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1월 예산안 통과를 위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뒤로 2001년 8월 모든 지원금을 상환하기까지 한국 사회는 형언하기 어려운 격변을 겪었다. 특히 외환위기 속에 저물어간 한국 기업의 흔적들을 한겨레신문에서 찾아봤다. 해설 김진철
최초의 파산은 1월 한보철강
삼미, 진로, 대농, 해태도 줄줄이
서울역 앞에는 노숙자 쏟아졌다
현대, 대우, 삼성차가 다투며
3차까지 간 기아차 입찰
결국 현대가 1조2천억원에 차지
대표적인 국내 토종 속옷업체 쌍방울이 자금난에 시달리다 1997년 10월 부도가 나고 공장은 멈춰 섰다. 1954년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형제상회’로 출발한 쌍방울은 1980년대 무역, 패션, 컴퓨터 업종까지 영역을 넓혔다. 1990년에는 무주리조트를 열고 프로야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까지 했다. 그러나 1993년부터 ‘1997 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최 준비에 자금을 과다 차입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1998년 쌍방울그룹은 공중분해됐고, 이후 법정관리를 받고 여러 업체에 인수되다가 2006년 ‘트라이브랜즈’를 거쳐 2011년 회사 이름을 쌍방울로 환원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2000년 1월 해체되어 에스케이(SK) 와이번스로 넘어갔다.
쌍방울에서 옷을 만들며 지칠 틈 없이 돌아가던 미싱이 멈춰 섰다. 문어발식 확장경영에 나섰던 쌍방울은 1998년 공중분해되고 만다. 이정용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은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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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도산, 증시 급락, 환율 급등
1963년 국내 최초 라면을 출시한 삼양도 외환위기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삼양 살리기 운동’까지 벌어졌지만 1998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부도를 냈고 채권단은 출자전환 형식으로 회사 지분 70%가량을 가져갔다. 1970~80년대 미국과 유럽 등으로 진출하며 큰 성공을 거뒀고 전자 부문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했었다. 부도 이후 구조조정을 거쳐 2000년대 들어 경영이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최근 불닭볶음면으로 다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경영난에 처한 삼양을 살리자는 시민들의 운동까지 벌어졌지만 결국 1998년 부도를 내고 만다. 정진환 기자가 촬영했으나 당시 지면에 보도되지 않았다.
여성복 브랜드로 유명한 신원은 1973년 설립되어 1990년대 중반 재계 30위권까지 올랐지만 외환위기로 부도 위기에 몰려 1998년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 절차)에 들어갔다. 2000년대 들어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신원명동빌딩은 2002년 매각됐다. 외환위기로 자금난에 몰린 신원 본사가 있는 신원명동빌딩으로 직원들이 발길을 옮기고 있다. 장철규 기자 촬영. 당시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외환위기의 시작을 알린 최초의 파산은 한보철강이었다. 1997년 1월23일 한보그룹은 부채 5조원을 갚지 못해 도산한다. 한보철강의 부도로 금융권의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기업들의 줄부도로 이어졌다. 한보에 이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 등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기 전까지 줄줄이 기업들이 무너졌다.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일은 ‘기아차 사태’로 불린다. 1944년 경성정공으로 설립된 이래 1960년대 오토바이와 화물차 등을 생산하고 1974년 국내 최초로 승용차 브리사를 제작한 기아자동차는 1975년 처음으로 완성차를 미국에 수출했다. 특히 1980년 출시한 소형화물차 ‘봉고’ 때문에 김선홍 회장은 봉고맨으로 유명하다. 기아산업이던 회사 이름이 기아자동차로 바뀐 것은 1990년이었다. 재계 서열 8위로 자동차뿐 아니라 철강, 무역, 건설 등 다양한 업종을 영위하는 계열사 28개를 거느리던 기아그룹은 1997년 자금난에 휘청이다 7월15일 부도유예 적용을 받게 되고, 기아자동차는 같은 해 9월24일 화의 신청에 이어 10월22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김선홍 회장은 1997년 10월29일 서울 여의도 기아 본사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아자동차는 1998년 4월 회사 정리 절차를 끝내고 같은 해 10월 현대그룹으로 넘어간다.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며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촬영 유창하. 한겨레신문 1997년 10월30일치 8면에 보도됐다.
기업 도산과 함께 금융시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증시는 급락하고 환율은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다.
기아자동차 이종대 사장이 1998년 10월19일 기아차 3차 입찰 결과를 발표하는 장면. 촬영 이용호 기자. 당시 지면에 소개되지 않았다.
1997년 10월30일 서울 남대문에서 달러를 사고파는 광경. 한겨레신문 10월31일치 1면에 실린 사진이다. 달러가 귀해지고 가격이 오르면서 달러를 구하기 어려운 이들이 남대문 암달러상에 몰리는 모습이다. 당시 사진설명을 보면 “암달러상들은 큰손들이 달러를 사재기하는 것 같다며 거래가 예상외로 활발하지 못하다고 전했다”고 돼 있다. 유창하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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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적인 순간
사진이 물린 1면 머리기사 첫 문장은 이렇다. “정부가 환율 폭등에 따른 환투기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한편,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후속조처를 발표하는 등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환율이 얼마이기에 폭등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외환시장은 (달러당) 원화 환율이 984.70원과 950원 사이를 오르내리며 진폭이 사상 최대인 34.70원이나 되는 널뛰기 장세를 연출했다. 6개월 전만 해도 달러 환율은 800원대였다.”
1997년은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지게 되는 비극적인 해이기도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21일 저녁 청와대에서 각 당 대선 후보 및 총재들과 경제회담을 열었다. 이날 밤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200억달러를 공식 요청했다. 다음날인 11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난 극복을 위한 특별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한달여 뒤인 12월18일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1997년 11월21일 저녁 청와대. 강재훈 촬영. 왼쪽부터 박태준 자민련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명예총재,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조순 한나라당 총재.
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온종일 협상을 벌였다.
1997년 12월3일 오전 임창열 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의 모습. 둘의 표정은 이날 오전 협상이 결렬된 직후여서 다소 굳어 있다. 대화 상대 중 ‘갑’이라 할 수 있는 캉드쉬의 얼굴이 좀 더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선입견 탓일까? 이정우 기자 촬영.
이날 밤 임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는 서로 악수하며 웃는 표정의 사진이 찍혔고, 최종판 1면에는 둘이 악수하는 사진이 게재됐다. 임 부총리는 캉드쉬 총재에게 문서를 전달했는데, ‘대기성 차관 협약을 위한 양해각서’였다. 이날 한겨레신문은 ‘IMF 충격’이라는 큰 제목 아래 8개 면에 걸쳐 관련 소식을 전했다.
“3일 저녁 정부 세종로청사 19층 경제부총리실. 경제장관 회의실로도 쓰이는 이 방에 임창열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가 굳은 표정으로 앞에 놓인 한 묶음의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서류는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정책의향서’와 덧붙은 ‘경제정책 운용계획서’. (중략) 서명식은 애초 이날 오전 9시30분으로 예정됐다가 캉드쉬 총재 쪽이 계속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통에 10시간 넘게 지연됐다. (중략) 캉드쉬는 임 부총리를 계속 다그치고, 임 부총리는 우리의 현실을 절절이 호소하며 캉드쉬에게 매달렸으리라. (중략) 서명식 장면은 통상적인 협상 조인식과는 전혀 달랐다. 준비된 서류에 양쪽이 서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잘 듣겠으니 제발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일방적으로 약속하는 행사였다. (중략) 우리의 ‘경제주권’을 외세에 넘기는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1998년 1월12일 낮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고양시 일산 자택을 방문했다. 김대중 당선자가 오찬회동을 위해 초청한 자리였다. 곽윤섭 기자 촬영.
1998년 1월13일 한겨레신문 1면과 5면을 보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캉드쉬 총재를 만나 “(기업이)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결합재무제표를 도입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어발식은 더 이상 안 된다. 이익이 안 나는 기업은 정리해야 한다. 기업의 목표는 국제경쟁력이다”라고 말했다. 캉드쉬 총재는 “한국이 강한 의지를 갖고 개혁한다면 국제통화기금 체제를 2년 안에 벗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 사태가 오기 전에 이미 개혁을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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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와 빅딜
구조조정은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서민들은 더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실업자가 속출하고 서울역 앞에는 노숙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통계청 집계로 1999년 8월 실업자는 모두 136만4천명이었다. 1998~1999년 노숙자는 2천~3천명으로 추산됐다. 국민승리21의 권영길 실업대책본부장은 당시 “법정노동시간을 주 40시간으로 줄여 실업자 발생을 막고 실업급여기금 10조원을 마련해 실업자의 기본생계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8년 4월23일 낮 서울역 광장에서 ‘제1차 실업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실업자와 노숙자 및 시민 등 300여명이 모였다고 한겨레신문은 1998년 4월24일치 23면에서 전했다. 이 사진은 이날치 신문 1면에 ‘실업자의 깊은 시름’이라는 제목 아래 실렸다. 한 실직자가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정우 기자 촬영.
이헌재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인 그해 4월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국제통화기금 체제에서 신설 금감위원장으로서 그가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기업 구조조정이었다. 금감위원장을 맡은 지 두 달여 만인 1998년 6월18일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55개 퇴출기업 명단을 확정 발표하고 향후 구조조정 추진 방향을 밝혔다. 주요 5대 재벌그룹인 현대 4곳, 삼성 4곳, 대우 5곳, 엘지(LG) 4곳, 에스케이(SK) 3곳의 부실 계열사가 1차 퇴출 대상에 포함됐다. 또한 이들 5대 재벌이 빅딜(사업교환)을 포함한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은행 여신(대출)을 중단하는 등 강력한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기로 했다. 특히 빅딜 추진 의지를 분명히 했는데, 대표적인 대상 업종으로 자동차를 꼽았다. 이때만 해도 현대는 물론 대우와 삼성그룹도 자동차회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금감위 9층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구조조정 방향을 밝히고 있다. 촬영 이정용 기자. 한겨레신문 1998년 6월19일치 1면에 보도됐다.
이헌재 위원장은 행정고시 출신으로 박정희 정부 시절 대통령 경제비서실을 거쳐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등을 지내고 1979년 율산그룹 사태에 휘말려 공직을 떠났다. 이후 미국 유학을 거쳐 대우그룹에서 임원과 대우반도체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경제특보로 경제공약을 입안했지만, 선거 일주일 만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외환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구성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으로 발탁됐다. 기업과 은행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초대 금감위원장을 지낸 뒤에는 2000년 1월부터 8월까지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인 2004년 2월에는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외환위기 극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재무부 출신 경제관료 인맥을 통칭하는 이른바 ‘모피아’의 대부로 국제통화기금 체제 이후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한 주범 중 한 명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책임이 가장 큰 재벌그룹보다는 일부 공기업과 대기업, 금융기관만 외국자본에 넘겨주면서 대량 정리해고 사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헌재 위원장이 발표한 55개 퇴출기업 중 5대 재벌그룹의 계열사들은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미미한 회사들이었다. 또한 이미 부도를 냈거나 사실상 퇴출을 눈앞에 둔 기업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심지어 이날치 한겨레신문은 3면 해설기사에서 “5대 그룹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동안 퇴출시키고 싶어도 종업원들의 반발 등 때문에 떼어내버리기 어려웠던 소규모 계열사를 명분 있게 정리한 셈이 됐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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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로 넘어간 기아
1998년 기아차 채권단은 국채입찰 방식으로 기아차 매각에 나섰다.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가 기아차를 따내기 위해 다퉜다. 특히 1995년 설립돼 1998년 3월 첫 승용차 양산 모델을 출시한 삼성차는 국내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기아차가 절실히 필요했다. 실제로 삼성은 1997년 기아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 부도유예 상태에 있을 때 기아차 인수를 추진했었다.
기아차 입찰은 부채 탕감 등의 문제로 진통을 겪었고 3차 입찰까지 간 끝에 결국 현대가 1조2천억원에 차지하게 됐다.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는 세계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큰 사건으로 평가된다. 2020년 현재 현대기아차는 국내시장 점유율이 80%를 넘고 세계 브랜드 톱5에 들고 있다.
<한겨레21>은 1998년 10월29일 제230호에 입찰 결과 발표 사진과 함께 ‘기아, 여의주인가 시한폭탄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현대가 기아차를 인수하면 생산능력이 165만대에서 250만대 수준으로 늘어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세계 10위 업체로 발돋움을 할 수 있지만, 막대한 부채 때문에 동반 부실화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정몽규 당시 현대자동차 회장은 1998년 10월19일 오후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아차 낙찰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다. 당시 38살로 ‘동안’이었던 정몽규 회장의 살짝 긴장한 모습이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1998년 10월20일치 한겨레신문 3면. 장철규 기자 촬영.
현재 현대산업개발을 주축으로 하는 에이치디씨(HDC)그룹 회장인 정몽규는 1996년 1월부터 1998년까지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의 동생인 정세영 회장은 1974년 한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 모델인 포니를 생산해 ‘포니 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뒤 아들 정몽규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그러나 1998년 12월 현대그룹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실상 장남인 정몽구 회장을 현대차와 기아차의 총괄회장으로 임명하는 전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정세영 명예회장은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고 정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강등됐다. 정몽규 회장의 에이치디씨그룹은 최근 아시아나항공 인수 작업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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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우
1999년 4월20일치 한겨레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대우조선 해외 매각’이었다. ‘대우 선단식 경영 포기’는 3면 머리기사 제목이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1999년 4월19일 서울 대우빌딩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촬영.
김우중 회장이 발표한 구조조정 계획의 뼈대는, 대우중공업 조선부문과 힐튼호텔 등 11개 계열사 및 사업부문을 추가 매각하는 내용이다. 34개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에서 자동차와 무역을 핵심으로 하는 8개 계열사의 자동차 전문 그룹으로 탈바꿈하는 방안이었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대우그룹이 정말 큰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대우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컸다.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고 1998년 상반기에는 삼성그룹을 제치고 현대그룹에 이은 자산총액 기준 재계 2위에 올랐지만 자체 구조조정이 지속적으로 지연되고 무리한 차입금이 발목을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특히 1998년 말부터 삼성그룹과의 대우전자-삼성자동차 빅딜 협상에 들어갔고 1999년 3월 ‘삼성차 잠정인수를 위한 기본합의안’이 타결되면서 김우중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서명했지만 결국 더는 진전되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1999년 여름에 접어들어 대우는 미국 지엠(GM)과의 대우자동차 경영권 문제를 둘러싼 협상마저 실패한다. 대우는 7월에도 고강도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지만 8월 채권단은 반려했다. 결국 1999년 8월16일 주식회사 대우와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등 12개 계열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대우증권은 계열 분리되어 채권단에 이양됐다. 1999년 11월 김우중 회장과 사장단이 퇴진함으로써 대우그룹은 사실상 해체됐고, 이듬해 4월 대규모기업집단 지정에서 제외되며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기업집단으로서는 10년간 ‘세계경영’의 신화가, 1967년 창립한 대우실업으로부터 따지면 30여년의 흥망성쇠가 마무리된 것이다. 대우그룹이 파산할 때 남긴 부채는 40조원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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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자동차 사랑은 결국…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자동차 마니아다. 2015년 국토교통부 집계를 보면, 이 회장은 자동차 124대를 갖고 있고 차량 가격은 모두 합쳐 450억원에 이른다. 부가티, 포르셰, 롤스로이스, 람보르기니 등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이르는 슈퍼카들도 포함돼 있다.
삼성자동차가 1995년 출범하게 된 배경으로 이건희 회장의 자동차 사랑을 흔히 거론한다. 당시 이미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 등으로 자동차 시장은 포화상태였다. 이 때문에 삼성자동차가 몰락한 근본적 이유는, 외환위기가 아니라 부적절한 시장 진입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1998년 삼성차의 부채가 4조원이 넘었던 것은 사필귀정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를 맞아 대기업 간 빅딜을 추진했다.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 역시 정부가 그린 그림이었지만, 삼성과 대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삼성은 1999년 6월30일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을 발표했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사업 맞교환이 발표된 1998년 12월7일 오후 서울 중구 삼성자동차 장충동지점에서 직원들이 앞날을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기자가 촬영했다.
법정관리 신청에 따라 채권단이 부채 4조3천억원을 떠안을 우려에 대해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삼성차에 출연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삼성차와 빅딜을 통해 반대급부 차원에서 긴급 자금 수혈의 기회로 삼으려던 대우그룹한텐 타격이 컸지만,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삼성자동차 부채를 (이건희 회장이 사재로) 책임지고 처리한다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다만 삼성의 방안은 삼성생명 상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삼성생명 주식시장 상장은 2010년에야 이뤄진다. 유배당 보험 계약자의 경우 삼성생명 회사 자산 형성에 기여한 만큼 상장 차익을 배당금으로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는 논란 때문이었다. 삼성생명 보험계약자들은 법정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 신청 이후 2000년 7월 프랑스 르노그룹 쪽이 삼성차 자산을 인수하고 삼성카드와 합작해 르노삼성자동차가 설립됐다. 아직 삼성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삼성그룹과는 무관하다.
2001년 8월23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체제에서 공식적으로 졸업했다. 1997년 12월 이래로 국제통화기금에서 빌린 195억달러를 모두 갚았다. 그것도 예정보다 3년여 앞당겨 조기상환할 수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2001년 8월24일치 1면에 2단짜리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제목은 ‘IMF 끝’.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국제통화기금 차입금 미상환 잔액 1억4천만달러를 송금하는 최종상환서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김종수 기자 촬영.
2001년 8월24일치 한겨레신문 9면 기사를 보면, 전철환 총재는 “현재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조기상환의) 기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하다”고 말했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김각중 전경련 회장,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 등 재계 단체들은 성명을 내어 “모두 아이엠에프 관리체제 때의 마음자세를 흩뜨리지 말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각오를 한층 다져야 할 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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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인 김진철 기자는 24시팀(현 사건팀) 팀장, esc팀장, 산업팀장 등을 거쳐 현재는 ‘한겨레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기사를 썼지만 주로 삼성 등 재벌그룹을 취재한 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 등의 책을 썼습니다.
기획 팩트스토리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 실화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2017년 설립 이후 6편의 르포, 웹소설을 개발했고 2편이 영상 판권계약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