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11화 삼성과 이건희
제11화 삼성과 이건희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13년 10월28일 오후 삼성그룹 ‘신경영 선언 20주년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들어서고 있다. 수행원의 손을 잡은 모습은 무척 힘겨워 보이고, 아래를 향한 시선은 무겁게 느껴진다. 이 회장은 이때로부터 6개월여 뒤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다. 김봉규 기자 촬영.
2014년 심근경색 쓰러지기까지
27년간 그의 행적을 살펴본다
반도체·휴대전화 도약 등 성과에도
불법 탈법 동원한 지분 승계로
오너 리스크가 변화의 발목을 잡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거처는 6년이 넘도록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20층에 있다. 2014년 5월10일 서울 이태원동 집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맞았다. 이후 응급조처로 심폐기능은 되찾았다고 한다. 인공호흡기나 특수 의료장비 없이 스스로 호흡을 하고 있으나, 의식은 없다는 게 6년여간 삼성 쪽 여러 관계자들의 일관된 설명이다. 이 회장의 사망설은 이 기간 종종 제기됐다. 특히 초기 3~4년 동안 10여차례 사망설이 스쳐 지났다. 언론사들은 때마다 그의 부고 기사를 업그레이드하며 보관 중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말실수를 하기도 했다. 2017년 8월,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로 재판을 받던 때였다. “이건희 회장님이 살아 계실 때”라고 했다가 “회장님이 건재하실 때”로 정정했다고 한다. _______
2013년 10월 마지막 등장 이 회장은 쓰러지기 직전께 언론에 등장하는 일이 뜸했다. <한겨레>에 이 회장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심근경색을 일으키기 6개월 남짓 전인 2013년 10월 삼성그룹이 개최한 만찬 행사 때였다. 만찬 행사에 나타난 그는 무척 힘겨워 보였다. 이때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 특히 오른손이 주목됐다. 그는 사진에 담기지 않은 수행원의 손을 움켜쥐고 있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경영 복귀 뒤 그해 말까지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2011년 말께부터 혼자 걷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12년 초 신년하례회 등에 등장한 이 회장은 수행원이나 가족의 손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건장한 수행원이 이 회장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서야 겨우 서 있는 장면도 기자에게 종종 목격됐다. 이 회장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50대 후반에 폐암 진단을 받고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엠디 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을 받고 건강을 찾았다. 이후로도 이 회장은 겨울에는 하와이 등지로 휴양을 떠나고 집에 완벽한 수준의 공기 청정 시스템을 갖추는 등 폐질환 재발을 예방해 왔다.
미국에서 암 치료를 받아온 이건희 회장이 가족과 함께 2000년 4월6일 삼성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귀국 절차를 밟고 있다. 이때 이 회장은 58살이었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동행했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3월22일 열린 삼성그룹 창립 55돌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당시 <한겨레> 3월23일치에 실린 사진에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부상하기 위한 제2의 창업을 선언하고 있다’는 설명이 달려 있고 사진에는 ‘제2창업 5주년 기념’이라는 글씨가 크게 붙어 있다. 이 사진은 당시 삼성그룹에서 제공받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언론사에서 경영 수업 시작 이 회장의 경영 수업은 언론사에서 시작했다. 1966년 10월 동양방송(TBC)에 입사한 뒤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을 거쳐 45살이던 1987년 12월 회장 자리에 오른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지병으로 별세한 직후였다.
1987년 12월 이건희 회장의 취임식. 45살이던 이 회장보다 나이 많은 주요 임원들이 즐비하다. 이 사진은 1999년 12월 <한겨레21> 289호에 실렸다. 이 회장은 <한겨레> 창간 이전에 취임했다. 사진은 삼성그룹에서 자체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21> 사진 설명에는 ‘이 회장은 취임 이후 경영의 질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업확장전략은 대부분 실패했다’고 적혀 있다. 이 회장 취임 이래로 12년이 지난 이때는 외환위기 중반을 넘어설 때였다.
1994년 9월9일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삼성가족 한마음축제’가 열렸다. 삼성그룹 임직원과 가족 등 8만여명이 잠실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삼성그룹은 신경영 실천의지를 다지기 위해 개최한 행사라고 설명했다. 사진은 강창광 기자가 찍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 등 10대 그룹 회장들이 1990년 5월10일 전경련회관에서 정부의 ‘5·8 조처’에 따라 비업무용 보유 부동산 1500만평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사진 촬영 진정영 기자. 노태우 정부는 당시 극성이었던 부동산 투기를 해결하고자 재벌그룹에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요구했다.
노태우 비자금 250억원 전경련은 재벌과 군사독재정권을 연결하는 구실을 했다. 정경유착을 통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비자금을 조성했고 재벌은 이권을 챙기고 자유롭게 문어발 확장에 나섰으며 도덕적 해이를 일삼았다. 이런 정권과 재벌의 밀월관계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금 가기 시작했다. 문민정부는 출범 초기에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공정거래법을 강화하면서 재벌을 견제했다. 그러나 문민정부 말기에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은 재벌개혁의 초심이 지속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1월21일 30대 재벌그룹 회장단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경제운용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문민정부 출범 1년이 채 안된 때였다. 왼쪽부터 구자경 엘지그룹 회장, 최종현 에스케이그룹 회장, 김영삼 대통령, 이건희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이 보인다. 이들은 웃고 있지만, 당시는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통해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지 5개월밖에 안된 때로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던 때다.
1995년 12월18일 서울 서초동 법원 앞. 점심시간이라 재판이 휴정되자 이건희 회장 등 재벌 회장들이 법원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 회장 뒤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등이 보인다. 이들 재벌 회장의 표정이 무심한 듯, 여유로운 듯, 불법행위를 저질러 재판을 받는 피고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정우 기자 촬영.
스포츠카 레이싱 1997년은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해이고 동시에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 이 회장은 매우 여유로운 모습으로 <한겨레> 지상에 등장했다. 뜻밖에도 출판기념회다. 이건희 회장은 1997년 12월1일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제목의 에세이 모음집을 펴내며 신라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참석 인사들은 전·현직 국무총리를 비롯해 국회의장과 감사원장 등 면면이 화려했다. 한때 재벌 회장들의 출간이 유행이기도 했지만, 이때는 이건희 회장 취임 10년이 되는 때였다. 이를 기념하는 여러 이벤트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출판기념회가 1997년 12월1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현재 전 국무총리, 이시윤 감사원장, 고건 국무총리, 오명 동아일보 사장, 이건희 회장, 김수한 국회의장, 김상하 대한상의 회장. 삼성그룹에서 찍어 제공한 이 사진은 <한겨레> 12월2일치 11면에 실렸다.
이건희 회장이 1997년 5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설비가동식에 참가해 개발 중인 자동차 시제품을 시승하고 있다. 당시 개발명은 KPQ, 이후 이 차는 SM5로 출시된다. 당시 출시 예정 일정은 1998년 3월이었다.
2009년 4월30일 오전 이건희 회장이 경기도 용인시 포곡읍 유운리에 있는 자동차경주장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스포츠카(SL63-AMG)를 직접 운전해 질주하는 모습.(위) 포르셰,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 10여대의 스포츠카를 바꿔 타보던 이 회장(아래 왼쪽)은 몇 시간 뒤 조수석으로 옮겨 탄 채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경주장을 떠났다. 류우종 기자 촬영.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정·재계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기존 기업들이 현재의 생산체제나 유통체제를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이 김 대통령 곁에 앉았다.
2001년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는 당시 장하성(왼쪽)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과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실장. 강창광 기자 촬영.
2008년 2월28일,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특검 조사를 받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이종근 기자 촬영.
이건희 회장은 특검 조사를 막바지에 받았다. 2008년 4월4일 오후 조사를 받기 시작한 이 회장이 다음날인 5일 새벽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취재진에게 둘러싸였다. 김진수 기자 촬영.
이건희 회장이 2008년 4월22일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퇴진 성명을 발표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뒤에 서 있는 이들은 삼성 계열사 사장단이다. 김진수 기자 촬영.
김용철과 조준웅 김용철 변호사는 조준웅 특검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특수부 검사 출신이기도 한 김 변호사가 수사 기간과 투여 인력 등에 의구심을 품고 일반 수사기관에 사건을 이관하라고 요청했으나 조 특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특검 마지막 조사에서 진술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공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지도 않았다. 2009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최종 선고받은 이 회장은 넉달여 뒤인 12월29일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단독 특별사면을 받았고, 2010년 3월24일 경영에 복귀한다. 조준웅 특검과 관련해 2012년 8월 <한겨레> 단독 보도로 조 특검의 아들이 2010년 1월 삼성전자에 입사한 사실이 확인됐다. 조 특검 아들의 삼성전자 입사 진행 과정은 이건희 회장 등의 재판이 열리고 있던 2008~2009년 시작됐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특검은 결과적으로는 도리어 이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에게 면죄부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일이 그들에게 행복하게 마무리되진 않았다. 삼성 비자금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2012년 이 회장의 맏형인 이맹희씨가 승계 과정에서 독차지한 차명 유산 중 자신의 몫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걸어왔다. 25년 전 이병철 회장이 숨지고 이건희 회장이 승계하는 과정에서 탈세를 위한 불법적 요소가 있었음이 드러나면서 형제간에 유산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_______
형 이맹희와의 유산 다툼, 말다툼 당시 이맹희-건희 형제의 말다툼은 외신들로부터 ‘막장 드라마’라는 지적을 받기까지 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발언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사뭇 충격적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소를 제기한 이맹희씨에게 “수준 이하다. 한 푼도 내줄 수 없다”고 먼저 불을 지피자, 이맹희씨는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했다. 건희는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며 맞불을 놨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날것 그대로 감정을 드러냈다.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다. 아버지가 ‘맹희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내제꼈다. 우리 집에서는 퇴출된 양반이다.” 이맹희씨는 81살, 이건희 회장은 70살이었던 때다.
이건희 회장이 2012년 5월24일 오후 유럽 출장을 마치고 서울 김포공항으로 귀국했고, 이맹희씨의 소송 건으로 기자들의 관심은 이건희 회장에게 집중됐다. 기자들의 예상과 달리 이 회장은 맹렬하게 감정을 드러내며 맏형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 회장의 얼굴에 분노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정아 기자 촬영.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13년 10월28일 오후 삼성그룹 ‘신경영 선언 20주년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들어서고 있다. 수행원의 손을 잡은 모습은 무척 힘겨워 보이고, 아래를 향한 시선은 무겁게 느껴진다. 이 회장은 이때로부터 6개월여 뒤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다. 김봉규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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