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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편집장 편지] 정주영·이병철·구인회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

등록 2020-09-03 11:26

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일제에서 나라를 되찾을 당시 땅은 부의 척도였다. 그 시절 고층 아파트야 없었지만, 지주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남한에선 1년에 1천 석 이상 거둬들이는 대지주는 905명이었다. 해방 직후 자작농 비율은 35%에 그쳤다. 그들 꿈은 작게나마 내 땅을 가져보는 거였다. 땅은 그렇게 ‘불평등’을 상징했다.

해방되자마자 토지개혁 열풍이 불었다. 북한에선 소련군이 1946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남한에선 토지개혁이 쉽지 않았다. 미군정과 가까웠던 한민당(한국민주당)을 비롯해 당시 정치 세력가는 지주 출신이었다. 이들은 토지개혁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농민은 농지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미군정 역시 정치 안정을 위해 이승만 정권에 토지를 개혁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공포한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이었다. 정부는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발행해주고 토지를 샀다. 정부가 사들인 토지는 소작인에게 유상분배됐다.

그 뒤 지주 계층은 몰락했다. 토지개혁이라기보다 전쟁 때문이었다. 토지개혁을 거의 끝마친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인 1950년 6월23일이었다. 이틀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토지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땅을 버려둔 채 피란길에 오른 지주는 먹고살기 위해 지가증권을 헐값에 넘겨야만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가증권을 갖고 있던 지주도 허황함을 맛봐야 했다. 전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보상금 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지주에겐 안된 일이었지만, 우리나라엔 잘 된 일이었다. 땅이 권력이자 부의 상징이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보였다. 땅의 ‘불평등’이 사라지는 듯했다. 새 시대가 오면서 지주 계층은 시대 흐름을 먼저 읽은 사람에게 위상을 물려줘야 했다.

바로 정주영·이병철·구인회 같은 기업가다. 그들은 ‘땅의 시대’를 넘어 ‘산업의 시대’라는 문을 열었다. 이런 기업가는 나라와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을 찾았다. 다리를 놓고, 설탕을 만들고, 치약과 칫솔을 내놨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산업화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일자리를 만들고, 그 결과 삶의 질을 높여 나갔다.

지주 계층이 여전히 권력자로 존재했다면 우리나라 산업화는 이렇게나 빨리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때 세계 5대 경제 대국으로 잘나간 아르헨티나가 기득권 계층으로 커 버린 대 지주들이 산업화에 저항하면서 나라가 뒷걸음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요즘엔 역사 뒤로 사라진 듯한 땅이 ‘부동산’과 ‘아파트’란 이름으로 다시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부동산은 극소수가 돈을 버는 승자 독식 게임이다. 한정된 자원을 소수가 독점하면 다른 쪽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불평등 원인이 바로 부동산 문제에서 비롯되는 이유다. 게다가 부동산은 상품을 만들거나 투자로 이어지지도 못한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를 넘어 4차 산업 시대로 도약하려면 기업가정신을 갖춘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한다. 정주영·이병철·구인회 같은 창업자가 그때 그 시절 땅에 집착했더라면 현대·삼성·럭키금성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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