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서 경제계 참석자들이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당시),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연합뉴스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을 바꿔 놓은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정부는 300조원의 재정‧금융지원 패키지와 316조원에 이르는 무역·금융 공급 및 업종별 지원 대책까지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실물경제 회복을 지원해왔다.
파상적인 코로나19 대응 산업 정책들은 종국에 한데 모여 ‘한국판 그린·디지털 뉴딜’로 짜였다. 돌이켜보면 코로나19 와중에 전기차·수소차·배터리·태양광·풍력·코로나 백신이 지난 1년간 시장과 기업을 지배해왔다. 산업 정책 관료, 현장의 실물경제 기업가, 언론·대중의 시야는 온통 친환경 신산업과 헬스케어 투자에 쏠려 있다.
흥미로운 건 요즘 재벌 대기업마다 굵직한 신산업 인수·합병·투자를 그룹 젊은 총수 한 개인의 ‘승부사 기질의 과감한 베팅’ ‘승부수를 던진 통 큰 투자’로 포장해 전하기에 바쁘다는 점이다. 사세 확장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 총수이자 거대 재벌기업가로서의 훗날 평판도 지금의 투자 각축에서 성패가 갈리게 될 거라는 조바심도 드러난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총수의 배짱과 빠른 결단을 요구하는 산업 격변의 시대이고, 기업의 명운을 건 각축에 들어선 형국인 건 맞다.
그래서일까. 올해 들어 유독 이재용 부회장, 정의선 회장, 최태원 회장, 구광모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이 투자 발표장이나 여러 행사장에서, 또 개별 회동에서 대중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버지 세대 ‘은둔의 제왕’에서 탈피해 이제 젊은 총수들은 작고한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래리 페이지처럼 여기저기 사회 유명인사로 눈길을 끈다. 바야흐로 ‘경영자 자본주의’ 시대다.
하지만 한 10대 재벌그룹 사장은 “근간 또는 종래의 국내 대기업 대형 투자를 ‘재벌총수의 결단·배짱’으로 표현하고 평가하는 건 재벌대기업 안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너무 단순화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라며, “중대하고 복잡 다기한 경영 행위를 영웅화 또는 사인화 범주로 변색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거대 투자는 총수의 개인적 고뇌와 용단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총수도 반대하기 어려운’ 기업 내 집단적 사고의 결론인 경우가 흔하다는 얘기다.
전례 없는 코로나19 제약 조건을 뚫고서, “총수들이 선두에서 지휘한다”고 다들 홍보하는 미래차·그린·디지털·융합 부문은 역동적으로 급변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이어져 온 경제계 판도를 뒤흔들어 놓을 격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통 석탄 화력에 의존해 성장해온 한국 제조업에는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이다. 지난 수십 년 국내 재벌기업 30위는 순위 변동이 거의 없다. 매출액 1조원이 넘는 자수성가한 신진 기업인도 드물다. 거대한 그린·디지털 급류에 올라타지 못한 채 수익성·성장성이 점점 떨어져 쓰러져가는 기업도 여럿이다. 다만 우리 눈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린·디지털 뉴딜 신산업 분야에서 “중소 협력업체와 벤처기업도 함께 품겠다”며 기업 간 ‘연대·협력’을 정부가 외치고 있지만, 이런 신산업을 영위하는 자본 분파는 거대한 물적·인적 자본력을 이미 갖추고 있는 독과점 기업들이다.
코로나19와 함께 개막한 21세기 두 번째 10년은, 1980~90년대에 그랬듯 ‘국가 주도 독점자본 강화’ 테제가 부활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든다. 천문학적 규모의 코로나19 ‘재정 화력 투입, 그 후’ 우리 재계의 서열과 풍경이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하기보다는 지금의 재계 구도가 더욱 공고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쪽을 나는 지지하는 편이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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