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전국사회적경제위원회 출범식에서 참가자들이 “사회적 경제! 혁신과 포용!”을 외치며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자 민주당의 21대 총선 공약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저는 사회적 경제를 응원하는 시민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합니다. 사회적 경제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여야 모두의 법안입니다. 사회적 경제 기본법의 법안 심사와 논의를 신속히 처리해 주세요.”
요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의 메일함에는 이런 내용이 담긴 전자우편이 쌓이고 있다. 기재위에 계류 중인 사회적 경제 기본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온라인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의 이름으로 발송되는 메일들이다. 국내 사회적 경제 단체 53곳이 꾸린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지난 11월24일부터 시민 주도 캠페인 플랫폼 ‘빠띠’와 함께 진행하는 이 캠페인에는 12월31일 오후 현재 3224명이 참여했다. 한 명의 시민이 참여할 때마다 기재위 의원들에게 법 제정을 촉구하는 이메일과 연대회의의 성명서 등이 자동 전송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사회적 경제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사회적 경제 기본법(이하 기본법) 제정은 해묵은 숙제다. 19대 국회 시절인 2014년 4월 처음으로 법안이 발의됐으니 벌써 7년째다. 지금까지 발의된 법안만 11건에 이른다. 연대회의의 강민수 정책기획위원장은 “기본법을 둘러싼 논의는 오랜 기간 충분히 이뤄졌고 쟁점도 웬만큼 정리가 된 상황이다. 더 이상 입법을 미루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본법 제정 촉구 캠페인의 제목도 ‘사회적 경제 기본법, 도대체 언제까지 미룰래?’이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절실함이 묻어난다.
기본법이 제정되면 뭐가 달라질까? 우선, 사회적 경제가 법적으로 ‘공인’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사회적 경제를 ‘국가와 시장 사이에 존재하는 조직에 내재된 것으로 사회적 요소와 경제적 요소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 3만개에 육박하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 기업이 존재한다. 이들은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 사회서비스 제공, 자원 순환 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 활동을 통해 국가나 시장이 풀기 어려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대부분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피하기 어려운 소상공인이지만, ‘고용조정 제로’ 선언과 고용연대기금 조성에 나서는 등 사회적 경제의 핵심 가치인 연대와 협동, 호혜의 정신으로 코로나 위기 극복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는 아직 법규범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사회적 경제의 정의가 뭔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근거 법률’이라 할 수 있는 기본법이 없는 탓이다. 물론 협동조합기본법 등 몇몇 개별법이 존재하지만, 부처별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다 보니 통일성이 없고 사회적 경제 공통의 법적 토대와 공유해야 할 기본 원칙 등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소셜벤처나 마을기업처럼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는 조직들도 있다. 강민수 위원장은 “사회적 경제 영역의 ‘모법’ 역할을 할 기본법이 제정되어야 사회적 경제의 고유한 속성을 규범화하고 자본 중심의 경제와는 다른 경제 활동의 범주를 정해 사회적 경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경제 영역을 보편적으로 규율하는 기본법이 있어야 사회적 경제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될 수 있다는 얘기다.
기본법은 통합적이고 효율적인 사회적 경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재는 조직 형태별로 근거 법률과 소관 부처가 달라 여러 사회적 경제 조직들에 대한 육성과 지원이 유기적으로 이뤄지기 힘든 구조다. 사회적 경제 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4대 부문’ 조직만 봐도, 협동조합은 협동조합기본법(기획재정부), 사회적기업은 사회적기업육성법(고용노동부), 자활기업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보건복지부)의 적용을 받는다. 마을기업은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육성사업 시행지침이 근거 규정이다. 그런데 사회적 경제 기업 중에는 협동조합 형태로 마을기업을 운영하거나, 자활기업을 운영하다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띤 경우가 적지 않다. 김영식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사무국장은 “기본법이 제정되면 여러 부처와 관련법으로 나뉘어 운영되던 사회적 경제 정책 체계가 간결해져서, 유사한 정책 사업의 중복과 부처 간 칸막이 등에 따른 비효율과 불필요한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현재 5건의 기본법안이 제출돼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강병원, 김영배, 양경숙 의원,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법안들이다. 법안의 내용은 큰 틀에서 대동소이하다. 5개의 법안은 대체로 △사회적 경제 정책의 효율적이고 통합적인 추진을 위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대통령 소속 사회적경제발전위원회와 한국사회적경제원을 설립하고 △5년 단위의 사회적 경제 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하며 △사회적 경제 조직에 대한 금융 지원을 위해 사회적 금융을 활성화하고 사회적 경제 발전기금을 조성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또 사회적 경제의 정의와 기본 원칙, 범위 등을 명시하고, 공공기관의 사회적 경제 기업 제품 우선구매 등의 지원 방안도 규정해 놓았다. 민주당 사회적경제위원회 입법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김영배 의원이 낸 법안은 사회적 경제를 “사회 구성원 간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경제 활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적 경제 기업 유형으로 ‘4대 부문’을 비롯해 16개 조직을 열거해 놓았다. 소셜벤처가 포함돼 있는 것이 나머지 4개 법안과 다른 점이다.
김영식 사무국장은 “기본법은 사회적 경제의 지원과 육성, 정책 관리의 인프라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익만을 중시하는 과거의 경제 시스템을 사람 중심의 경제 체제로 바꾸는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핵심적인 법률이라 할 수 있다”며 “프랑스와 스페인 등 사회적 경제 선진국들도 비슷한 법률을 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법 제정안은 19대 국회 때인 2014년 4월,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처음으로 발의했다. 67명의 새누리당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 유 의원은 제안 이유에서 “사회적 경제가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과 11월에는 신계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의원과 박원석 정의당 의원도 법안을 발의하면서 법 제정 논의는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법안 발의에 참여한 의원 수가 국회 과반에 육박하는 142명이나 됐다. 그러나 2015년 7월 유 의원이 ‘소신 발언’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원내대표에서 물러나면서 동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반대로 돌아섰다. ‘사회주의 경제법’ 운운하며 색깔 공세를 펴기도 했다. 결국 세 건의 법안은 소관 상임위(기재위) 법안심사소위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20대 국회 들어서도 유승민 의원과 민주당 윤호중·강병원 의원이 각각 법안을 발의했지만 19대 국회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보수 야당은 여전히 거부감을 드러냈고, 여당은 대통령의 공약임에도 별다른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선거법 등 정치적 현안을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갈등 탓에 늘 뒷전으로 밀렸다.
“국민의힘은 사회적 경제 법안이 자신들의 법안임을 기억하라. 여당 또한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대통령의 공약을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연대회의가 지난 11월 낸 성명서의 일부다. 과연 새해에는 사회적 경제 기본법이 여야 모두의 법안이 될 수 있을까?
이종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jk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