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말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광교신도시에서 문을 연 경기도 기본주택 홍보관의 전용 44㎡ 규모 아파트 거실. 연합뉴스
서울 아파트값 폭등으로 불붙은 국민의 ‘부동산 분노’가 엘에이치(LH) 사태를 거치면서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불법과 탈법 양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미개발 정보를 이용한 투기는 범죄이고, 보상 극대화를 위해 용버들을 빼곡하게 심은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는 사기 행각이다. 이런 짓을 버젓이, 그것도 보상 담당 직원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대규모 택지개발 역사가 벌써 몇십 년인데 이런 방법이 여태껏 통용돼왔다는 것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갖가지 ‘뒷북’ 대책이 또다시 쏟아진다. 그럼에도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이제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자포자기 심정도 든다. 이렇게라도 해서 투기를 차단하고 불로소득을 철저하게 환수할 수 있는 방안이 법과 제도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집값 폭등과 극심한 자산 불평등에 따른 국민의 좌절과 분노가 줄어들 수 있어서다.
그러나 다주택자 중과세나 보유세 현실화, 공직자 등의 투기에 대한 처벌 강화 같은 규제의 한계는 분명하다. 지금처럼 사상 초유의 저금리로 돈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고강도 규제로 잠시 주춤하는 듯한 집값과 전셋값은 자그마한 충격만으로도 득달같이 치솟는다. 전∙월세 폭등에 따른 무주택자의 주거 불안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다. 전∙월세난을 견디다 못한 이들이 모든 걸 쏟아부어 주택구매 행렬에 들어서면 오를 대로 오른 집값이 또다시 탄력을 받는다.
대규모 택지개발을 통한 매매주택 공급 확대의 문제점 역시 명확해졌다. 또 다른 불법과 투기의 온상이 되고, 막대한 토지보상금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수요 억제도 공급도 작동하지 않는 진퇴양난이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지금과 같은 소유 중심의 주택 정책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전∙월세 안정을 위해 여당이 야심 차게 도입한 ‘주택임대차3법’이 기대 만큼의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전∙월세 상승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데 그쳤거나, 세입자를 몰아내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서울 마포에서 전세를 사는 중견기업 P부장은 이 법의 혜택을 보았지만 2년 뒤 걱정에 여전히 노심초사한다.
이젠 발상의 대전환이 불가피하다. 주택정책의 변두리에 있던 공공임대주택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아야 할 때가 됐다. 양질의 장기 공공임대 외에는 무주택자들이 신뢰할 만한 주거 대안이 없다. 내 집에 버금가는 공공임대를 대량 공급하는 혁신적 접근이 아니고는 주거 불안과 집값 폭등의 악순환을 끊기 어렵다. 저소득층과 서민만 염두에 둬서는 공공임대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정부가 2021년부터 추진한다는 ‘질 좋은 평생주택’이 제대로 공급될지도 미지수지만, 그 정도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는다.
경기도가 내놓은 기본주택 정책이 무주택자의 눈길을 확 끄는 이유다. 기본주택은 무주택자의 보편적 주거권을 전면에 내걸고 경쟁력 있는 임대주택의 대량 공급에 초점을 맞췄다. 주택을 자산증식 수단으로 여기지 않거나 그럴 경제력이 없는 사람도 주거 안정을 위협받지 않는 선택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낳을 만하다.
그동안의 주택정책이 풀리지 않는 매듭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식이라면 기본주택 발상은 매듭을 잘라버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무주택자를 볼모로 잡은 집값의 거품을 줄여나가려면 이런 정도의 강력한 비전과 집행 의지가 필요하다. 경기도는 2021년 2월 광교에 기본주택 홍보관을 설치한 데 이어 유튜브를 통해 홍보 영상을 내보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기본주택의 공급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3기 신도시에서 기본주택 공급이 가시화하는 등 주택시장에 보내는 신호가 명확해야 한다. 엄포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동안 지겹도록 확인했다. 물론 기본주택이 절대 선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질 좋은 공공임대라는 대체재가 내 집과 ‘선의의 경쟁’을 할 때 주거 안정과 자신의 상황에 맞는 합리적 선택이 가능해진다.
평생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기본주택은 내 집이 없는 청년에게만 절실한 게 아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자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퇴직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기본주택의 대량 보급을 통해 집값 거품이 빠지고 전∙월세가 안정되는 것이 이들에게 나쁘지만은 않다. 자산가치는 떨어지지만, 주택 매각을 통한 노후 생활자금 확보를 훨씬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셋값이 폭등하고 전세가 자취를 감춰 언제 월세로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퇴직자가 집을 팔 수 없다. 급여 소득 없이 3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비싼 월세를 무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이다. 게다가 자력으로 내 집을 마련하기 더 힘들어진 자식을 생각하면 집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한층 커진다. 여기에 주택 보유에 따르는 세금과 건강보험료 등의 지출 부담은 갈수록 늘어난다. 장부상 집값만 올랐을 뿐 현금화할 수 없으니 금융 자산이 부족한 퇴직자의 남은 삶은 오히려 팍팍해질지도 모른다.
실제 한국의 집값 상승과 소비 관계를 분석한 연구 결과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보통 자산 특히 실물자산 가치가 오르면 소비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현상을 경제학에서 ‘자산효과’(Wealth Effect) 또는 ‘부의 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2003~2018년 자료를 바탕으로 한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의 2019년 분석 결과를 보면, 한국에선 주택가격 상승이 소비를 되레 위축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집값과 전∙월세 때문에 대출이자 부담이 증가한 무주택자와 주택구입자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든 게 가장 큰 원인이다. 또 1주택자들이 씀씀이를 늘리기 힘든 현실도 작용한다. ‘부의 역효과’라고 할 수 있다.
부의 역효과에 가장 취약한 사람이 바로 퇴직자다. 이들은 곶감 빼먹듯 예금을 헐어 쓰는 것도 불안해한다. 비싼 집에서 생활자금 조달에 쪼들리며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임대료 폭등 걱정이 없는 임대주택에서 윤택하게 사는 편이 훨씬 낫다. 이는 언젠가 닥칠 집값 폭락의 충격을 줄여주는 안전판 구실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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