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아닌 신용등급만 따져, 7등급 이하라야 통과
신청자 절반, 제한에 걸려…일부러 등급 낮추기도
신청자 절반, 제한에 걸려…일부러 등급 낮추기도
시장에서 5년째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씨와 이씨. 김씨는 재산이 8000만원이고 한달에 150만원가량 수입을 올린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김씨는 그동안 카드대금 등을 연체한 적이 없고 나름대로 신용관리를 해 신용등급이 5등급이다. 이씨는 재산이 1억3000만원이고, 한 달 수입은 200만원 정도다. 하지만 이씨는 현금서비스를 자주 받고 연체 이력도 있어 신용등급이 8등급이다. 장사가 잘되지 않아 운영자금이 필요한 김씨와 이씨가 함께 미소금융 지점을 방문해 대출을 신청하면 어떻게 될까? 김씨는 신용등급 조건 때문에 아예 대출 신청조차 할 수 없다. 반면 김씨보다 재산과 소득이 많은 이씨는 문제없이 1차 관문을 통과하고 실제 대출도 받을 수 있다.
저소득·저신용계층에게 창업자금과 운영자금을 저금리에 빌려줘 자활을 도와주는 미소금융사업의 ‘신용등급 조건’이 논란이 되고 있다. 미소금융 대출을 신청하려면 한국신용정보, 한국신용평가정보, 코리아크레딧뷰로 등 3개 신용평가사 가운데 최소 1곳으로부터 신용등급 7등급 이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저소득·저신용계층을 지원한다고 하지만 소득조건은 없고 신용등급 제한만 있다.
이러다 보니 소득이 적더라도 신용관리를 잘한 사람은 미소금융 지원대상에서 처음부터 배제된다. 물론 신용등급이 좋으면 은행 대출을 이용할 수 있지만, 대출금리가 미소금융의 창업자금대출(연 4.5% 이내)이나 무등록사업자대출(연 2.0% 이내)에 비하면 훨씬 높다. 결국 저소득자 중에서도 신용관리에 ‘실패’한 사람에게만 ‘저금리 특혜대출’ 혜택을 주는 셈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신용등급을 기준으로 자격 조건을 제한하는 것은 결국 자기관리가 부족한 사람을 먼저 대우해주겠다는 얘기”라며 “소득은 낮지만 신용관리는 잘한 사람이 창업을 통해 성공할 가능성도 더 높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소액대출) 사업과 미소금융의 자격 조건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신나는 조합’과 ‘사회연대은행’ 등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하고 있는 단체들은 신용등급으로 대출자격을 제한하지 않는다. 신나는 조합 관계자는 “소득과 재산 기준만 충족하면 대출 신청을 할 수 있다”며 “가난해도 대출 상환을 잘해 신용등급이 나쁘지 않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신용등급으로 자격 조건을 제한하다 보니, 미소금융 지점을 찾은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신용등급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발길을 돌리고 있다. 컴퓨터 자수업체를 운영하다 형편이 어려워져 최근 서울의 한 미소금융 지점을 찾은 이영숙(56·가명)씨는 신용등급이 6등급으로 나와 대출 신청을 할 수 없었다.
상담 직원은 “현금서비스를 받은 게 있어 혹시 한두 달 뒤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때 다시 오라”며 이씨를 돌려보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신용등급을 나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신용정보회사에 문의하거나, 일부러 여러 금융회사를 돌아다니며 신용조회를 해 신용등급을 떨어뜨리는 사례도 있다”고 귀띔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재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은행 대출이 불가능한 7등급 이하 사람들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쪽으로 결정했다”며 “미소금융 대출조건에 대해 여러 문제제기가 있는 만큼 3개월 정도 제도 운영을 해본 뒤, 개선점에 대해 논의를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수헌 기자 minerva@hani.co.kr
한 미소금융재단의 대출 현황/미소금융 대출 주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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