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이 눈치보면 물가 잡는 통화정책 못펴
[아하! 그렇구나] 중앙은행 독립성
한국은행이 김중수 총재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에 정례적으로 제출한 ‘브이아이피(VIP) 브리프’ 실체가 드러난 것을 계기로,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왜 중요한 것일까요. 한은은 우리나라의 통화정책을 맡고 있는 곳입니다. 한은의 첫째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입니다. 그 수단은 기준금리 조정을 통한 통화량 조절입니다. 그런데 금리인상 효과가 나타나는 건 보통 6~9개월 뒤부터입니다. 사람들이 파티에서 술에 취해 신나게 놀고 있을 때 한은은 슬며시 술을 치워 파티가 과열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정부와 국민들은 파티가 좀더 오래 계속되길 바랍니다. 선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는 금리인상과 같이 국민들에게 고통스런 정책을 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중앙은행이 독립적이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부 눈치를 보느라 물가안정을 소홀히 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과 정부의 긴장 관계가 그 나라의 경제에도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된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카터 행정부와 레이건 행정부에 걸쳐 9년(1979~87)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을 지낸 폴 볼커는 정부와 끊임없이 긴장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물가를 잡아 통화가치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대규모 실업과 경기침체를 감수하면서 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려 백악관과 곧잘 마찰도 빚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집은 결국 15%에 육박하던 인플레를 3%대로 진정시켰고, 90년대 미국 호황의 초석이 됐습니다.
중앙은행이 행정부에 예속될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은 이미 여러 차례 증명된 바 있습니다. 일본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의 90년대 ‘잃어버린 10년’은 엔화 강세로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중앙은행이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금리를 낮추면서 발생한 자산거품이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립성 문제가 늘 시빗거리였습니다. 우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1차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은 총재를 비롯한 구성원들의 중앙은행 독립성을 향한 의지입니다.
미국 정부는 연준의 통화정책에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연준 의장을 갈아치우지도 않습니다. 미국 행정부의 중앙은행 독립성 존중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 연준의 현재 위상도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30년대 대공황 당시만 해도 미 정부는 연준이 금리를 올리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철강업계는 연준의 금리인상에 반발해 연준 앞마당에 고철을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연준의 독립성은 이런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쟁취한 것입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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