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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금융·증권

“한국금융 나아갈 길은 글로벌화”

등록 2012-04-02 21:20수정 2012-04-03 10:49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
인터뷰 / ‘47년 금융인생 마감’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
세계와 가까운 인천으로
하나금융 본사 이전 추진

퇴임 뒤에도 수렴청정?
미소금융·하나고에 전념

1천억대 사회공헌기금 조성
다문화가정 아동지원 계획

지난달 28일 종로구 청진동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 사무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은 47년 금융 인생과 15년간 최고경영자(CEO) 생활을 마무리하고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곳이었다.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은행 업무가 아닌 일을 시작한 첫 주였다. 하나금융 회장실의 절반도 안 되는 그 사무실에서 그의 첫 말은 “홀가분하다”였다.

 김승유 회장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금융의 과거, 미래, 현재를 엿볼 수 있었다.

  

  과거 1965년 그가 졸업반 때였다. 그해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이 270달러였었고,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2달러였다. 대기업이 사람을 뽑지 않아 청춘들이 취업하기 힘든 지금처럼, 그 때는 대기업이 거의 없어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하기 힘들었다.

 그해 그는 어렵사리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대기업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 은행은 당시 대학생에게 인기직종이었다. “그때만 해도 은행에서 신입사원을 2~3명 정도 뽑았을 때였죠. 한일은행은 제법 큰 은행에 속했는데도, 영등포·신촌·동대문·광교 등 서울에는 4~5개 지점 밖에 없었어요. 우리나라 금융 산업은 그렇게 뒤쳐져 있었습니다.”

 한일은행에서 3년 동안 근무하다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은행 외국부(국제부)에 있었는데, 외국부에서 매년 7~8명이 유학 가는 거예요. 같은 부서에 있다 보니 나도 좀 더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죠.”

 늦둥이 아들이 유학 가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제발 가지 마라. 장가가서 손자 낳고 살면 얼마나 좋으냐”며 많이 반대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2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고민하던 그에게 아버지는 “갔다 올 때까지 안 죽을 테니, 다녀와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냉엄한 인수합병(M&A)의 승부수인 김 회장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부모님께) 진 죄게 많아…” 김 회장은 몇 해 전 스톡옵션을 받은 자금을 털어 아버지 호를 딴 ‘동파’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는 달랑 200달러 들고 미국에 갔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MBA)에서 공부할 때는 한 달에 80달러에 달하는 월세가 없어 불법으로 취업해 아르바이트하면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귀국한 뒤에는 한 동안 대학 강사로 나가 ‘투자론’과 ‘포트폴리오매니저먼트’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는데, 개발을 하기 위한 자본이 없었다. 그래서 시중의 사채자금을 양성화해 경제개발 종자돈으로 활용하기 위해 단자회사들을 만들었다. 그는 그 단자회사 중 하나였던 한국투자금융에 입사했다.

 20~30명으로 시작한 신생 금융회사였다. 현재의 금융회사와 견주는 규모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 작은 조직의 ‘열정’과 ‘주인의식’이라는 기업문화는 하나금융의 기업문화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한국투자금융은 인원이 작다 보니 사장부터 행원까지 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임원은 직원에서 자율권을 보장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은 ‘나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주인의식을 갖게 되면서 열정을 발휘했다.

 “29살 때였죠. 한국투자금융 신입사원을 뽑는데 특정 대학 출신만 추천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실로 뛰어 들어갔죠. ‘이 회사에 그 대학 출신이 아닌 사람도 많이 있다. 그만두라는 뜻이냐’고 따졌죠.” 직원들은 사장 집에 가서 ‘섯다’와 ‘고스톱’을 할 정도로 경영진과 직원간의 격이 없었다.

 1980년대는 그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금융권 빅뱅’의 바람이 불었다. 런던증권시장이 국제 금융 중심지의 지위를 위협받게 된 영국정부는 1986년 10월27월 증권매매 위탁수수료 자유화, 은행과 증권 간 장벽 철폐, 외국 금융기관의 자유로운 참여 허용 등을 뼈대로 한 조처를 내놓는다. 빅뱅으로 전 세계 대형은행들이 증권회사를 소유하고 금융자본의 집중과 거대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게 됐다. 우리나라도 1986년 이후 경상수지 흑자 기조로 시장금리가 하락세를 보이는 등 금융시장 여건이 개선됨에 1988년 12월1일 금리자유화계획을 발표했다.

 그 때 한국투자금융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동안은 은행권 보다 높은 금리로 땅짚고 헤엄치기 식 경영을 해 왔던 회사는 이제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했다. 단자회사의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모드를 바꿔야 했죠. 증권사, 종금사, 은행으로 업종을 바꿔야 했습니다. 저는 사장에게 ‘은행으로 가자’고 했어요. 쉽지는 않았죠. 당시 은행자본금을 1000억을 모아야 했으니까요.” 일부 직원들은 은행으로 업종을 바꾸면 급여가 깎인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한국투자금융은 준비과정을 거쳐 1991년 6월 하나은행으로 변신한다. 그때 한일투자금융은 국제증권으로 전환했는데, 삼성이 이를 인수해 현재의 삼성증권으로 만들었다.

 1997년 하나은행장에 취임한 김 회장은 보람은행을 시작으로 충청은행과 보람은행을 연이어 인수하며 인수·합병에 뛰어든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그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했다. “인수를 당한 직원도 구조조정을 당했고, 인수를 한 하나금융 직원도 구조조정을 당했거든요.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직원들의 원망의 눈빛을 보았죠. 본인 직장이 없어지는데, 조직 커지는 게 상관있겠어요. 평생토록 하나금융에 안티를 하겠다는 섬뜩한 편지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친척까지 구조조정을 당했다. “서울은행을 인수할 때 6촌 매부가 서울은행에서 근무했었거든요. 그 매부마저 구조조정을 당했죠. 집안 어른들이 그 거 하나 안 도와주느냐고 꾸지람을 많이 들었죠. 허허.”

 하지만 김 전 회장은 구조조정을 할 때 차등을 두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1998년에 5개 은행이 퇴출됐는데, 퇴출은행 출신 중에 하나은행에서만 본부장 이상이 3명이나 일하고 있어요. 다른 은행에는 그런 분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2000년 들어 국내에서는 금융지주사 설립 붐이 불었다. 순환출자의 복잡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대기업과 달리 투명성을 확보해 대외 신용도를 높이고, 부실금융기관 인수합병을 활성화해 경쟁력을 확보해 글로벌 금융그룹을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2005년 12월 하나금융지주가 출범했다. “처음 (금융지주사를) 시작할 때 대형 금융지주사와 제대로 경쟁할 수 있을까라고 참 많이 걱정했었죠.”

 인수합병만이 살 길이었다. ‘우리금융이 힘드니 외환은행으로 방향이 튼 것 아니냐’는 지적에 “처음부터 우리금융과 외환은행, 2곳을 놓고 저울질했어요. 우리은행은 정부가 매각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었지만, 외환은행은 사적인 계약이어서 언급하지 않은 것뿐이지요. 외환은행 인수를 얘기하면 파리만 잔뜩 꼬이게 하는 거잖아요. 사실 외환은행이 더 유리했어요. 우리금융 인수하면 구조조정 엄청나게 해야 되지만,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은 겹치지는 지점이 48개 밖에 안 돼요. 명퇴 한번만 하면 될 정도로 중복되지 않거든요. 게다가 외환은행은 외환·대기업 업무가 강점이고, 우리는 소매금융이 강점이니 시너지 효과가 있었죠.”

  

 현재 퇴임은 지난해 결심했다고 했다. “그 때 물러나려고 했는데, 외환은행 인수가 안 돼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1년만 더 하자고 회사 정관을 변경했습니다. 정관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임기를 남겨 놓고 퇴임한다고 하면 모양새가 더 이상해 졌겠죠.”

 퇴임을 앞두고 그는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하는데, 3년 임기를 두 번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줘야 될 것 같았습니다. 한번만 하면 얼마 뒤 곧바로 레임덕이 생기니까요. 시이오의 정년퇴직이 70살이니 60살 전후의 젊은 후배 중에서 사람을 찾았죠. 이곳저곳 많이 알아 봤는데, 같은 값이면 내부 사람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장기 집권하면서 후계자 양성에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잭웰치처럼 후계양성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정설로 돼 있습니다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건 자신만의 라인을 만드는 거죠. 후계자에 대한 기본적인 제 철학은 양성프로그램과 다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표현이 ‘누구를 데리고 있었다. 누구를 키웠다’는 겁니다. 조직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이 후계자가 되는 겁니다. 치열한 정글의 게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후계자로 살아남습니다. 제이미 다이먼 제이피(JP)모건체이스 회장도 비크람 팬디트 씨티그룹 최고경영자도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겁니다.”

 ‘하나금융 여전히 수렴청정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적극 해명했다. “김종열 전 사장이 은행장으로 있을 때 저는 일부러 여의도에 있는 하나대투 사무실을 썼어요. 을지로에 있는 행장에게 자율권을 주기 위해서였죠. 물론 키코 사태와 법인세 문제 불거지면서 하나금융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면서 다시 을지로에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 생각은 후임자에게 자율권을 주는 거예요. 지금도 하나금융에 제 사무실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화요일에는 미소금융중앙재단에 오고, 수요일에는 하나고에 갈 거예요. 물론 미소금융과 하나고 사람들은 아마 싫어 할 거. 하하.”

 

 미래 그는 금융의 인재관에 대해서도 말했다. “생각을 개방적으로 가져가야 해요. 우리끼리(금융계 사람들) 하겠다는 생각 버려야 합니다. 씨티 은행이 리테일 뱅크하면서 필립모리스 사장을 최고경영자로 데리고 왔습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금융에 접목하기 위해서였지요. 산업과 금융은 믹싱(혼합)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외국 사람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이 30년 동안 노력했지만 잘 안됐죠. 우리는 외국인과 경쟁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국제금융 시장에서 성공하기 힘들어요.”

 우리나라 금융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묻자, 그는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호주와 캐나다는 국가 신용도도 우리나라 보다 높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죠. 국제금융 할 수 있는 여건은 더 좋은 겁니다.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해외자산 비중도 높잖아요.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의 국내자산만 따지면 그들에 뒤지지 않아요. 하지만 해외시장에서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국내만 보지 말고 사람을 훈련시켜야 해요. 하루아침에는 안 됩니다. 인재양성과 해외진출이 필요한 거죠.”

 그가 인천 청라에 ‘하나금융타운’ 조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나금융타운에는 33만㎡ 규모로 조성돼, 하나금융지주 본점 부서 일부와 금융 연구개발(R&D)센터, 교육연수시설, 정보기술(IT) 센터, 물류센터 등 핵심 기반시설이 들어선다.

 “우리나라의 금융회사가 글로벌 금융회사로 성장하려면 지리적인 여건도 중요합니다. 장기적으로 하나금융지주 본사를 인천으로 옮기려 합니다. 인천은 서울 시내에서 인천공항 전철로 15분, 여의도에서 30분밖에 걸리지 않고, 중국과 홍콩과도 가깝죠. 국내 영업을 하는 은행은 서울 시내에 있어야 하지만, 글로벌 전략을 세우는 지주는 좀 더 세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메가뱅크에 대해선 그는 조심스러웠다. “강만수 장관 비판하는 거라서 말하기 쉽지 않네요. 허허.”

 향후 거취에 대해 그는 미소금융과 하나고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미소금융과 사회연대은행 등 기존 마이크로크레딧 기관을 비교하며 미소금융의 장점을 강조했다. “기존 마이크로크레딧 기관은 복지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미소금융은 금융과 복지를 융합하는 데 좀 더 방점을 두고 있는 게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무작정 서민을 위해 금융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재기를 위해 금융을 지원하는 게 차이입니다.”

 그의 또 다른 관심사인 하나고는 어떨까. 하나고가 우리나라 입시 문제를 푸는 대안이 될까? “대안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 입시 문제의 실마리는 풀 수 없겠죠. 다만 대학입시에 매달려 학원에 가서 인성 교육을 못하는 상황에서 조금은 개선되겠죠. 하나고는 미국의 고등학교처럼 예체능 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니까요.”

 공로금 논란에 대해 묻자, 그는 “(언론 모르게) 조용히 주면 좋을 뻔 했다”라며 농담을 했다. 그는 “(공로금을) 가질 수는 없어요. 하나금융은 다 같이 만들었는데… 그러면 직원들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받은 공로금은 장학재단(동파 장학회)과 하나고, 신세진 대학(고려대)에 기부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앞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선보일 ‘작품’은 아마, 1000억대의 사회공헌 기금일 것이다. 론스타는 사회공헌기금으로 1000억원을 내놓기로 한 약속을 지킬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언론이 많이 도와줘서 외환은행 인수대금을 4900억원 깎았으니, 그 중 일부는 사회공헌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다문화 가정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동이 4만2000명쯤 됩니다. 그들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구구단도 가르치도록 할 생각이에요. 대학생들이 등록금 때문에 걱정인데, 그들에게는 장학금 주는 식으로 해서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과외를 받을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지금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김 전 회장은 상반기 중으로 이 계획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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