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을 이용한 금융사기가 기승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올 한 해 8만계좌 개설 넘을 듯
‘금융 사기’ 지능화·다양화가 원인
감독 느슨한 농협 등에서 많이 발생
금감원, ‘신속 지급 정지제’ 추진
은행간 ‘취약 고객 정보’ 연내 공유
‘금융 사기’ 지능화·다양화가 원인
감독 느슨한 농협 등에서 많이 발생
금감원, ‘신속 지급 정지제’ 추진
은행간 ‘취약 고객 정보’ 연내 공유
경기도에 사는 40대 중반 여성 윤아무개씨는 지난 6월 한 저축은행 팀장을 사칭한 이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 장기대출로 전환하도록 해준다는 말에 솔깃한 윤씨는 전화를 건 팀장이 알려준 곳으로 통장과 현금카드를 퀵서비스로 보냈다. 며칠 내로 담당 직원이 방문해 계약서를 쓸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신 자신도 모르는 새, 그의 통장에선 5회에 걸쳐 120만원씩 600만원이 입금됐다가 전액 인출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윤씨는 피해금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될 뿐 아니라 1년간 예금통장 개설이 제한되는 등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경찰 신고 이후에야 알게 됐다. ‘대포 통장’을 이용한 금융사기에 당한 것이다.
대포통장은 금융사기범들이 불법으로 매입하거나 계좌 주인을 속여 가로챈 예금통장이다. 금융거래 경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의 통장을 통해 돈을 빼가는 것이다. 금융사기는 크게 보이스피싱을 비롯해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빼내는 피싱사기와 저금리 대출 전환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거나 통장을 가로채는 대출사기가 있다.
금융감독원은 올해 대포통장 계좌가 지난해보다 더 늘어나 8만건을 넘길 것으로 추정된다고 10일 밝혔다. 금감원은 금융사기에 취약한 노인 등 고위험군 고객 정보를 은행끼리 공유한 뒤 대포통장으로의 이체를 막는 ‘신속 지급정지제’를 추진하고 있다.
금감원의 ‘대포통장 개설 현황’ 자료를 보면, 대포통장 계좌는 집계를 시작한 2011년 4분기에 1만2880건(전자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법에 따른 지급정지 계좌 기준)이었다가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3만7524건과 3만7883건으로 늘었다. 올해 들어선 증가세가 더 가파르다. 지난 1~8월 기준으로 대포통장은 이미 4만133건에 달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각종 대책에도 대포통장이 계속 늘고 있는 추세인데다 7월29일부터 피싱사기뿐 아니라 대출사기에 연루된 계좌도 별도 소송 없이 피해구제 신청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대포통장들이 많이 포착된 영향도 있다”고 급증 이유를 설명했다. 금감원은 연말까지 ‘피싱’사기에 관련된 대포통장만 4만5000건에 달하고, 피해구제 신청이 가능해진 대출사기 관련 계좌가 포함되면 연간 규모가 8만6000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대포통장이 늘어나는 것은 갈수록 금융사기 수법이 지능화되고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있는 계좌이체 정보를 변조해 해커가 지정한 계좌로 입금되도록 하는 ‘메모리 해킹’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전통적 피싱사기로 꼽히는 보이스피싱마저 올 들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김병기 금감원 서민금융지원팀장은 “과거에는 전화 한통으로 피해자를 속였다면, 최근에는 경찰과 금감원, 은행 직원을 사칭한 3인1조가 3번 전화를 거는 ‘3차 콜’이 기본이다”라며 “한번 걸리면 통장 비밀번호까지 알려줄 정도로 감쪽같이 속는다”고 말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금융사기 피해 신고액은 올해 1~8월 182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267억원)에 견줘 44% 증가했다.
금융회사 업권별로 보면, 관리감독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농협(단위조합)과 우체국, 새마을금고 등에서 대포통장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증권사 계좌가 대포통장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급증했다. 2012년만 해도 15건으로 전체 대포통장의 0.1%에 그쳤던 증권사의 대포계좌는 지난 8월 기준으로는 2960건으로 전체의 7.4%를 차지했다.
정부는 2012년부터 대포통장 근절을 위한 종합대책을 여러차례 발표했지만 속수무책이다. 이주형 금감원 서민금융지원국장은 “금융사기를 많이 당하는 거주지와 성별·연령대, 거래 시간대 등을 분석해 고위험군 고객 또는 거래유형을 마련하고 금융회사끼리 공유하도록 하겠다. 이런 고위험 고객들이 대포통장 의심계좌에 이체나 송금을 하려고 할 때, 은행들이 미리 인지해 못하도록 막는 ‘신속 지급정지제도’를 구축해 내년중으로 도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지난 4월 단기간에 계좌를 여러개 개설하는 등의 90가지 의심계좌 유형을 은행들에 내려보낸 바 있는데, 이번에 추출하는 고위험군 고객 유형과 연계해 상시 감시에 나서도록 할 방침이다. 일단 돈이 빠져나가면 피해구제가 어렵기 때문에 예방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2011년 이후 올해 상반기까지 피싱사기 구제 신청에 따른 환급률은 전체 피해액의 15.5%에 그친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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