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지체장애인 손녀를 둔 김아무개(68)씨는 손녀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서울에 작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김씨는 은행을 들렀다가 우연히 장애인을 위한 특별부양 신탁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스로 재산을 관리할 수 없는 장애인을 위해 부모 등 후견인이 증여한 재산을 금융회사(신탁사)가 관리하면서 부모가 사망하더라도 생활자금을 마련할 수 있게 돕는 제도다. 그러나 김씨는 5억원까지 증여세가 비과세되긴 하지만 만일 신탁을 해지하게 되면 면제된 세금을 물어내야 한다는 은행 쪽 설명에 가입을 망설이게 됐다. 김씨는 “아이가 자라면서 급히 돈이 필요할 수 있는데, 사망 때까지 무조건 신탁을 유지해야 한다니 너무 비현실적인 규정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애인 특별부양 신탁제도’가 까다로운 규정 탓에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 제도는 1998년에 도입됐으나 20년 가까이 한 번도 손질되지 않았다.
8일 금융투자협회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장애인 신탁제도 취급 건수는 20건(수탁금액 92억원)에 그칠 정도로 상품 판매가 지지부진하다. 하나은행·신한은행을 비롯해 삼성생명·한화생명·미래에셋생명, 엔에이치(NH)투자증권·신영증권 등 이 상품을 취급하는 7개 은행·보험·증권사의 모든 실적을 합한 수치다.
이 제도가 장애인 가족들의 외면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신탁 원금이나 신탁 부동산을 중간에 인출하거나 매각하면 면제됐던 증여세를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탁재산이 5억원이라면 내야 할 세금이 7000만~8000만원가량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장애인이 상급 학교에 진학을 해 교육자금이 필요하거나 몸이 아파 치료비가 필요할 경우에는 목돈을 써야 할 수도 있는데, 이 제도는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며 “평소 장애인 가족의 문의가 일주일에 1~2건 정도 오는데, 이런 사실을 알려주면 계약을 꺼린다”고 설명했다.
증여세 면제 한도가 18년째 ‘5억원’에 묶여 있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과거 은행금리가 연 10% 이상 고금리일 때는 5억원을 맡기면 연간 5000만원 정도의 수익이 발생했지만, 최근처럼 1.5%대의 저금리 상황에서는 신탁수익으로는 최소한의 생계유지도 어려운 상황이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장애인 수탁제도는 보통 원금 손실 위험이 없는 예금이나 채권 등 안정적인 투자처에 투자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5억원을 맡길 경우 연이율 1.5%로 계산하면 한 달에 62만5000원 정도의 수익이 나는데 최저 생활비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 등도 제도 보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보건복지부는 2013년 건국대학교에 의뢰해 ‘정책 연구 평가’를 실시하고, 이런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금융위 역시 2014년 금융위원장 주재로 ‘장애인 금융제약 해소 간담회’를 열어 장애인 신탁 제도의 세제 혜택 규정을 보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획재정부 쪽에서 ‘세금 문제는 탈세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혀 더 이상의 논의가 진전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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