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차명계좌는 끊임없이 갈아타기가 이뤄져 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를 찾아내 2008년 삼성특검에 넘겼던 삼성특별수사감찰본부(특수본·본부장 박한철)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비자금이라고 하면 ‘꼬리라도 밟힐라’ 조용히 묻혀 있는 모습을 떠올릴 법하지만, 삼성 차명계좌는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했다는 얘기다.
삼성 차명계좌는 1970년대 기업공개 정책과 함께 출발했다는 게 삼성 쪽 설명이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출자총액제한과 채무보증제한을 풀어주겠다며 기업공개 활성화 정책을 펴자, 이병철 회장이 정부 시책을 따르면서도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임직원 명의로 몰래 지분을 돌려놨다는 설명이다. 차명계좌는 1987년 11월 이건희 회장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정상적인 상속재산이었다면 냈어야 할 50% 수준의 상속세는 피해갔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8년 4월22일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비자금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이른바 ‘차명계좌 갈아타기’가 이어져온 가장 큰 이유는 임직원들의 변심이었다. 퇴직을 앞둔 임직원 일부가 차명계좌의 존재를 폭로하겠다고 나서거나, 숨진 임직원 유가족들이 소유권을 주장해 골치를 앓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결국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현직 임원들 앞으로 명의(계좌) 갈아타기가 꾸준히 이뤄져 왔다. 특수본 관계자는 “사실 그런 분쟁 사건이 단서가 돼 우리도 차명계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계좌 갈아타기의 또다른 이유는 그룹의 분가였다. 이 회장 형제자매 등이 한솔(1991년)과 신세계(1991년) 씨제이(1993년), 새한(1997년), 중앙일보(1999년) 등을 떼어 독립해 나가면서 이들을 따라가는 임직원 명의의 계좌를 없애야 했던 것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이후에도 차명계좌 갈아타기는 계속됐다. 금융기관은 거래자 실명을 확인하고 계좌를 개설하고 기존 계좌도 실명확인 절차를 절차를 밟아야했지만, 삼성 차명계좌 앞에선 금융실명제도 소용이 없었다. 박찬대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삼성 차명계좌 개설 현황 자료를 보면, 2008년 당시 금감원 검사로 확인된 실명확인의무 위반 계좌는 모두 1021개인데 이 가운데 1987년부터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1993년까지 개설된 계좌는 22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그 이후 개설됐다. 2000년 이후 개설된 계좌도 796개에 이른다.
전체 적발된 계좌 가운데선 삼성증권 계좌가 756개(75%)로 가장 많다. 1993년 처음으로 삼성증권에서 6개 차명계좌 개설된 뒤 계좌 개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앞서 삼성은 1992년 11월 국제증권을 인수해 삼성증권을 출범시켰는데, 때마침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가장 믿을 수 있는 계열사를 ‘차명 주거래 증권사’로 삼은 것이다. 은행계좌 가운데 가장 많이 개설된(64개 중 53개) 우리은행은 옛 한일은행 시절부터 삼성과 주거래은행이었던데다, 삼성 본관에 지점이 입점해 있어 관리가 용이했다는 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 2008년 특검 수사 때는 우리은행 지점에서 삼성 쪽 요청으로 불법 계좌추적까지 해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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