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4일 오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통화정책의 역할: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열린 2018 BOK 국제컨퍼런스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한국은행 제공
“통화정책 운용 때 자국 정책의 여타 국가로의 전이(spill-over)와 그로 인해 자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spill-back)까지 고려할 필요성이 커졌다.”
지난 4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과 관련한 ‘3대 고민’ 가운데 하나로 ‘통화정책의 국제적 전이’를 꼽았다. 그는 “2013년 긴축 발작(taper tantrum)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FRB)의 정책 기조 변화에 대한 신호가 신흥시장국에서의 급격한 자본유출과 국제금융시장 불안을 초래했다”며 “최근에도 미국 금리상승과 달러화 강세가 일부 신흥국 불안의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나라 사이 교역이 활발해지며 정책효과가 국경을 넘어서 발휘된다는 얘기다. 실제 올해 들어 미국 경기가 좋아지고 그에 따라 금리를 올리자, 아르헨티나와 터키 등에서는 급격한 자본유출과 통화가치 하락으로 비상이 걸렸고 ‘다음은 어느 나라냐?’란 의구심이 퍼져나가고 있다. 이 총재가 언급한 ‘전이 현상’을 통해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3년 ‘긴축 발작’ 때와 현재 상황을 비교해봤다.
■ 미 통화정책이 금융위기들의 배경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2000년대 초 아이티(IT·정보기술) 버블 붕괴와 9·11 테러로 정책금리를 1%(상단 기준)까지 낮췄다가, 경기가 회복세 속에서 2004년 6월부터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정책금리는 2년 만에 5.25%로 4.25%포인트나 인상됐고, 이런 속에서 저금리 시절 키워왔던 부동산버블이 갑자기 터지면서 미국 경제가 휘청거렸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연준은 다시 1년3개월 사이(2007년 9월~2008년 12월) 정책금리를 0.25%까지 5%포인트나 떨어뜨렸다. 또 달러를 시장에 푸는 양적 완화에 나섰다. 그 결과 2007년 5조달러대였던 글로벌 유동성은 2013년께 9조~10조달러 수준까지 늘었다. 넘치는 달러는 수익률이 높은 신흥국 시장으로 주로 흘러가 위기를 진화했다.
세계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세를 보이자 2013년 5월, 벤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은 양적 완화 축소 검토를 언급했다. 이에 인도와 브라질 등 신흥국 통화가치와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고 달러화 가치가 급등했다. 이 총재가 언급한 이른바 ‘긴축 발작’이었다. 어른(미국)이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자, 아이들(신흥국들)이 급체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 모양새였다. 놀란 연준은 결국 1년7개월 뒤인 2015년 12월에야 정책금리를 0.5%로 0.25%포인트 올릴 수 있었다.
연준은 이듬해인 2016년 한차례(0.25%p)에 이어 2017년에는 세차례(0.75%p) 정책금리를 올렸다. 올해 들어서는 3월 한차례 인상했고, 오는 12~13일 회의 때도 0.25%포인트 인상해 정책금리는 2%가 될 예정이다. 2000년 이후 18년 만에 실업률이 3%대로 떨어지는 등 경기 호조가 지속하면서 미 연준은 하반기에도 한두차례 금리를 올릴 전망이다. 이처럼 미국 금리 인상이 본격화되자, 올해 들어 아르헨티나와 터키 등에서 자본유출과 통화가치 급락이란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교훈에 따라 미 연준이 시장과 교감 아래 점진적인 금리 인상을 진행 중인데도, 신흥국 일부에서 다시 ‘비상등’이 켜진 셈이다.
■ 5년 만에 반복된 위기, 한국은?
2013년 긴축 발작 당시 한두달 새 미국 국채금리는 1.1%포인트나 뛰었고, 신흥국 시장은 12%(MSCI 신흥국지수)나 하락했다. 당시 달러가 많이 유출되고 통화가치 추락을 겪었던 신흥국들은 ‘취약 5개국’(fragile 5, 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터키·브라질·인도네시아), ‘취약 8개국’(5개국+헝가리·칠레·폴란드)으로 불리며 국제금융계의 골칫거리가 됐다.
당시 한국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초기에는 주가가 10%가량 떨어지는 등 함께 흔들렸지만, 금세 정상을 찾으며 전체적으로는 달러가 더 유입됐다. 당시 통화정책에 관여했던 한은 관계자는 “이때 신흥국 시장 차별화 얘기가 나왔다. 한국은 풍랑이 불 때 대피해 있을 수 있는 ‘안전 항구’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안전 항구’일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해 신관호 고려대 교수(경제학과)는 “글로벌 금융위기 뒤 신흥국들에 달러가 많이 유입됐는데, 이게 환율 절상(자국 통화 강세)으로 이어져 경상수지 적자가 늘고 내부적으로 신용(부채)을 팽창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일부 신흥국들이 ‘긴축 발작’을 겪었는데, 한국은 경상수지가 흑자였고 글로벌 금융위기 뒤 자본 유입량도 상대적으로 적어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긴축 발작 전인 2009~12년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은 1320억달러에 달했고, 외환보유고도 3000억달러대로 넉넉한 수준이었다.
오늘날 일부 신흥국들에서 위기가 다시 발생한 이유는, ‘긴축 발작’ 때 문제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투자와 소비 과잉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와 과다한 대외채무, 빈약한 외환보유고 등이 여전한 나라들에서 미국 통화정책의 부정적인 전이 효과가 재연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달러가 강세를 보일수록 이들 신흥국의 채무평가액은 늘고, 그에 따라 달러로 지급해야 하는 이자도 더 늘어나는 중이다. 악순환에 빠진 셈이다.
이 총재는 고민을 토로했지만, 한국 상황은 그나마 낫다. 긴축 발작 뒤인 2014~2017년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은 역대급인 3700억달러에 달하고, 외환보유액도 4000억달러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다. 가계부채라는 폭탄이 있는 데다, 미국보다 금리가 낮다는 점도 부담이다. 이 총재가 고민을 토로한 배경이기도 하다.
성균관대 김성현 교수(글로벌경제학과)는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국이고 외환보유고도 넉넉해 아직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현재 역전돼 있는 미국과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면 어느 순간 급격하게 자본이 유출될 수 있다. 따라서 한은의 통화정책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감내할 수 있는 금리격차 수준’과 관련해 “1%포인트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본다. (현재 격차가 0.25%인 만큼) 아직 여유가 있는데, 그 사이 가계부채 문제를 최대한 해결하고, 장기적인 정책 목표를 뚜렷하게 제시한 뒤 흔들림 없이 추진해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신 교수도 “현 상황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작지만, 다른 나라의 위험이 전염될 가능성이 있고 내부적으로는 가계부채 문제도 있어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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