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액이 최근 사상 최초로 4000억달러를 넘어섰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때(39억달러)보다 100배 넘게 불어 ‘외환위기 안전판이 그만큼 강화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한 나라가 비상상황에 대비해 비축하고 있는 외화자금’인 외환보유액은 기업이나 국민이 외국에서 돈(달러)을 많이 벌어들일수록 많이 쌓인다. 당연한 말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외환위기가 터진 뒤인 1998~2017년 20년 동안 쌓인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7000억~8000억달러 수준으로, 같은 기간 외환보유액 증가분보다 두배 가까이 많다. 특히 최근 5년(2013~2017년) 경상흑자 누적액은 4500억달러인데, 외환보유액 증가분(3270억→3893억달러)은 623억달러에 불과하다.
그 많은 달러는 어디로 갔을까? 정답은 민간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대외 금융자산과 금융부채를 보여주는 한국은행 국제투자대조표(잠정·2018년 3월 말 기준)를 보면, 8947억달러에 이르는 대외채권 소유주체는 △중앙은행이 3981억달러 △정부 269억달러, △예금취급기관(은행) 2086억달러 △기타부문(비은행 금융기관·일반기업) 2611억달러로 민간부문이 공공부문(중앙은행+정부)보다 더 많다. 이는 지난해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화법을 빌자면 ‘외환시장의 주도권은 중앙은행에서 시장으로’ 넘어간 셈이다.
과거 수출기업들은 해외에서 수출대금(달러)을 받으면 국내은행에서 달러를 원화로 바꿔 필요한 곳에 지출했고, 달러를 받은 은행은 다시 한국은행에서 원화로 바꿨다. 이렇게 한국은행에 쌓인 달러는 고스란히 외환보유액이 됐다. 하지만, 현재는 기업들도, 금융기관들도 굳이 환전하지 않는다. 달러예금을 보유하고 있거나, 달러채권 등에 투자하며 자산을 불려 나가는 것이다.
외환보유액은 경제위기 때 방파제 구실을 하기에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민간 소유 외화자산은? 당국에서야 위기 때 외화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지만, 실제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다. 이윤을 좇는 기업 특성상 위기(달러화 강세) 때 원화를 던지고 달러화를 사들여 결과적으로 위기를 더 부추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간 보유 외화자산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한국은행이 관리하는 외환보유액과 달리 좀더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해 수익률이 더 높다. 전체 국부의 증가에는 민간 부문의 역할이 크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적정한 정도의 외환보유액은 얼마일까? 한은 국제국 허현 차장은 “정답은 없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기준(수출액×5%+총통화×5%+단기외채×30%+기타부채×15%)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많이 언급된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아이엠에프는 이 수식에 따른 나라별 적정 외화보유액을 발표했는데, 우리나라는 3814억달러(2018년 기준)였다. 현재는 국제기준을 충족시키는 외환보유액을 쌓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안심할 일은 아니다. 지난 5월 <월스트리트저널>은 “아르헨티나 외환보유액 617억달러는 아이엠에프가 제시한 기준(652억달러)을 거의 충족시켰지만 외환위기에 직면했다”며 “외환보유액이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하는 효과가 경미하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한국도 외환보유액의 20% 이상을 풀었지만, 정작 시장을 안정시킨 것은 (미국과 맺은 3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였다고도 했다. ‘세계 9위 외환보유액’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덧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게 한국을 포함한 신흥국들의 운명인 셈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