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서 열린 경제패러다임 전환과 한국경제의 미래 정책 세미나 모습. 사진 정세라 기자
촛불 지식인 선언 이후 진보개혁 진영의 개혁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취지가 담긴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민간 학회 공동주최 정책세미나에서 발표자가 주최 쪽의 발표문 수정·삭제 요구를 거부한 끝에 사실상 참석불가 통보를 받는 일이 빚어져 논란이 일고 있다.
22일 한국개발연구원과 한국경제학회가 공동 주최한 ‘경제 패러다임 전환과 한국경제의 미래’ 정책세미나에서 첫번째 세션 ‘금융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정책과제’ 발표자였던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가 연구원이 요구한 발표문 수정을 거부한 끝에 참석 자체가 불발됐다. 이에 따라 이날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서 열린 세미나 현장에선 전 교수의 발표문이 빠진 자료집이 배포되고, 첫 세션을 건너뛴 채 두번째 세션부터 진행됐다. 앞서 이 세미나는 금융·재벌·조세 개혁 3가지 주제의 세션이 이어진 뒤 종합토론으로 들어간다고 행사 당일 오전에도 언론 보도자료를 통해 공표됐던 터다. 하지만 현장에선 자세한 사정 설명은 생략한 채 ‘재벌중심 경제의 한계와 기업의 선진화’ ‘포용적 성장을 위한 조세정책 방향’ 2개 세션으로 진행한다는 알림만 이뤄졌다.
전 교수가 이날 발표하려 했던 내용은 금융산업정책이 금융감독을 압도하는 감독의 후진성이 현재의 금융위원회를 정점으로 한 금융감독체계의 문제에 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려면 금융감독체계 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연구원과 갈등이 빚어진 발표 부분은 개혁을 위한 ‘액션 플랜’(실행계획)으로, 여기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겸 증권선물위원장을 민간 개혁 인사로 교체해야 하며, 금융위원장 사임과 금융위 관료 대기 발령 등을 거쳐 금융개혁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금융감독체계개편을 위한 법률개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전 교수는 “촛불 지식인 선언 이후 진보개혁 진영이 말하는 개혁과제들을 짚어보자는 성격이 있는 자리였고, 주최 쪽이 밝힌 정책세미나의 취지 자체가 구조개혁 추진 ‘전략’을 논의하는 것이어서 수정을 거부했더니 참석이 어렵겠다는 뜻을 전달해왔고 나도 이에 합의했다”면서 “연구원이 문제 삼은 금융위원장 사임 등은 특정인을 겨냥한 게 아니라 금융감독 체계개편을 얘기하는 것인 데다, 이런 자리에서 발표 일부를 삭제하라는 요구를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7월에 교수 등 진보개혁 성향의 지식인 320여명은 개혁지체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경제민주화 과제를 과감하게 추진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주최 쪽인 연구원 강동수 연구본부장은 “(삭제 요구는) 우리가 국책연구기관이라서가 아니라, 전 교수 발표문 중 액션플랜에 ‘인사’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어 학술대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정책세미나에서 금융위 해체 등 시스템 문제 거론은 가능하지만, 인사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일정 선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아서 행사 전날 ‘발표자 불참’에 합의했다”고 말했다.
이날 세미나는 애초 전성인 교수와 더불어 경실련 재벌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박상인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 등 대표적 개혁성향의 경제학자들한테 금융·재벌 개혁 발제를 맡기는 방식으로 기획됐던 터다. 또 원로 진보 경제학자인 장세진 인하대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고, 김진방 인하대 교수와 황성현 인천대 교수 등 다른 진보개혁 성향 경제학자들도 대거 토론회에 참가했다. 이 자리엔 청와대 김현철 경제보좌관도 축사를 하러 참석해 “우리 경제가 변화해야 할 시기에 맞춰서 재벌개혁·금융개혁·조세개혁 화두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는 게 굉장히 시의적절하고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학자는 “개혁과제를 들어보자고 만든 자리이고 국책연구기관뿐 아니라 민간 학회도 공동 주최자로 들어가 있는데, 민간 학자의 그 정도 주장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며 “국책연구기관 이외에 정부 다른 쪽의 압력이 있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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