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사망 소식이 알려진 김정주 넥슨 창업주. <한겨레> 자료사진
국내 ‘벤처신화 1세대’로 꼽히는 김정주 넥슨 창업자 겸 엔엑스씨(NXC·넥슨 지주회사) 이사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아이티(IT)·게임 업계가 충격에 빠지는 모습이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방준혁 넷마블 이사회 의장 등 게임업계 최고경영자들과 종사자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회사 지배구조의 변화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전문 경영인 체제가 안정적으로 갖춰져 있지만, 엔엑스씨 지분을 상속받게 될 유족들이 회사 지분을 보유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할 경우 ‘매각설’ 등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애도의 글. 페이스북 갈무리
■김택진 “인생길 같이 걸어온 벗” 애도 2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김정주 이사 사망 소식이 알려진 1일 밤 온라인 공간에서는 게임·아이티 업계 관계자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졌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내가 사랑하던 친구가 떠났다. 살면서 못느꼈던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밝혔다. 김 대표와 김 이사는 1990년대 국내 피시(PC)게임의 원조로 꼽히는 ‘리니지’와 ‘바람의나라’를 각각 내놓으며 한국 게임산업을 개척해왔다. 김 이사가 김 대표를 ‘형’이라 부를 정도로 관계가 가까웠다.
2015년에는 넥슨이 보유 중이던 엔씨소프트 지분 약 15%를 기반으로 경영 참여 의사를 밝히며 둘 사이에 경영권 싸움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후 넥슨이 엔씨소프트 지분을 처분하면서 분쟁은 일단락됐다. ‘미운 정, 고운 정’을 두루 나눈 관계였던 셈이다. 김 대표는 이날 추모 글에서 “같이 인생길 걸어온 나의 벗, 사랑했다”며 “이젠 편하거라 부디”라고 애도했다.
방준혁 넷마블 이사회 의장은 언론을 통해 추모의 뜻을 밝혔다. 방 의장은 “지난해 제주도에서 만났을 때 산악자전거를 막 마치고 돌아오는 (김 이사의) 건강한 모습과 환한 얼굴이 아직 떠오른다”며 “오랜 게임업계 동료로서 무한한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재욱 ‘쏘카’ 대표도 이날 에스엔에스를 통해 “김정주 선배는 많은 것을 이뤘지만 (벤처 창업) 후배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떤 벽도 느껴지지 않게 눈높이를 맞춰 이야기했다”며 “벤처업계의 큰 별이 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장인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의 아이티 회사 게시판 등에는 김 이사를 추모하는 업계 종사자들의 게시 글과 댓글이 잇따르고 있다.
다만, 넥슨과 엔엑스씨는 김 이사가 사망한 미국 외에 국내에는 빈소나 추모공간을 따로 마련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넥슨 매각설’ 다시 불거질까 업계에선 김 이사가 보유한 엔엑스씨 지분 67%의 향방에도 관심이 쏠린다. 넥슨 지주회사인 엔엑스씨(비상장)는 일본에 본사를 둔 넥슨 지분 47%를 보유하고, 넥슨의 자회사로 넥슨코리아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가 평가한 김 이사의 자산 가치는 133억달러(약 16조원)에 이른다.
업계에선 오너 가족·측근 등이 승계를 두고 다투는 식의 ‘경영권 갈등’이 엔엑스씨에서 불거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김 이사가 일찍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전문 경영인 체제를 갖춰 놓은 데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김 이사 자신도 지난해 7월 “역량 있는 다음 주자에게 회사를 맡기겠다”며 엔엑스씨 대표이사 직을 내려놓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바 있다.
다만, 김 이사의 부인인 유정현 엔엑스씨 감사 등이 지분을 유지할 의지가 없는 등의 경우에는 매각설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2019년 김 이사는 자신의 엔엑스씨 지분과 유 감사 지분 29% 등 일가 지분 98% 전량을 매각하겠다고 밝혔다가 철회한 바 있다. 앞서 2018년부터는 사재를 출연해 재단을 설립하고 어린이재활병원을 세우는 등 게임사업보다 사회책임경영 활동 등에 집중해오기도 했다. 김 이사의 안목과 의지로 추진해온 가상화폐 거래소(코빗)와 유모차 브랜드(스토케) 등 다양한 분야 사업들을 엔엑스씨가 유지할지 여부 역시 불확실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대형 게임사 임원은 “넥슨은 사업 초기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탄탄히 정립해와 김 이사의 유고에도 ‘본업’인 게임사업엔 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넥슨 곳곳에는 그의 색깔이 반영된 ‘게임 외’ 사업들이 여럿 남아있다. 김 이사 없는 넥슨이 이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갈지는 관심사”라고 말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